두량미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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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왕도(王都)를 둘러싼 대성군(大城郡) 및 상성군(商城郡)에 설치되어 있었던 6개의 군영(軍營), 즉 육기정(六畿停) 중 하나.
이칭
이칭
서기정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신라 경덕왕 대
폐지 시기
고려시대
주관 부서
육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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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두량미지정은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왕도(王都)를 둘러싼 대성군(大城郡) 및 상성군(商城郡)에 설치되어 있었던 6개의 군영(軍營), 즉 육기정(六畿停) 중 하나이다. 757년(경덕왕 16)에 서기정(西畿停)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대체로 경주시 서면이나 산내면, 혹은 건천읍의 부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왕도(王都)를 둘러싼 대성군(大城郡) 및 상성군(商城郡)에 설치되어 있었던 6개의 군영(軍營), 즉 육기정(六畿停) 중 하나.
내용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대를 전후하여 왕도(王都)를 둘러싼 대성군(大城郡) 및 상성군(商城郡)에 설치되어 있던 6개의 군영(軍營), 즉 육기정(六畿停)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양주(良州) 상성군조에는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정인데 757년(경덕왕 16)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 때 경주에 합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량미지정을 음(音)이 유사한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 지금의 청도군 각남면)에 비정한 견해도 있었으나, 고려 때 경주에 합쳐졌다고 하였으므로 경주 경내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근내정(根乃停), 즉 중기정이 대체로 경주시 건천읍에 비정되므로, 서기정은 그 서쪽의 서면이나 산내면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군영의 소재지를 산성으로 볼 때 부산성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부산성은 그보다 중기정과 관련된 곳으로 보인다. 교통로에 주목하는 견해에서는 아화역(阿火驛: 지금의 서면 아화리)이나 의곡역(義谷驛: 지금의 산내면 의곡리)에 이르는 도로 근처에 비정하고 있다.

한편 두량미지정이 일반 군현의 현(縣)과 같이 일정한 관할 구역이 있었다면 서면 및 산내면 정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왕경 6부 중 대체로 모량부(牟梁部)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단행본

정구복 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논문

박성현, 「신라 왕경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대구사학』 134, 대구사학회, 2019)
정요근, 「통일신라시기의 간선교통로: 왕경과 주치 · 소경 간 연결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 63, 한국고대사학회, 2011)
이문기, 「신라 경덕왕대에 재편된 왕도 방어 군사조직과 성곽의 활용」(『신라문화』 3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9)
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이기동, 「신라 중고기 청도 산서지방의 전략적 중요성: 서기정의 기원문제에 부쳐서」(『신라사회사연구』, 일조각, 1997)
민덕식, 「신라왕경의 방비에 관한 고찰」(『사학연구』 39, 한국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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