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정(東畿停) · 남기정(南畿停) · 중기정(中畿停) · 서기정(西畿停) · 북기정(北畿停) · 막야정(莫耶停)의 여섯 정을 말한다. 신라인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으므로, 정은 군영(軍營) 또는 군영소재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畿)란 왕기(王畿)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육기정 중 동기정은 대성군(大城郡 : 경주의 동쪽 교외에 비정됨.)에 위치하였고, 나머지 다섯 기정은 모두 상성군(商城郡 : 경주의 서쪽 교외에 비정됨.)에 자리하였다. 육기정의 명칭은 원래 신라의 토착적인 것이었으나,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주 · 군 · 현의 명칭을 한식(漢式)의 미칭(美稱)으로 개정할 때 함께 개정되었다.
육기정의 개정 전의 명칭을 보면 동기정은 모지정(毛只停), 남기정은 도품혜정(道品兮停), 중기정은 근내정(根乃停), 서기정은 두량미지정(頭良彌知停), 북기정은 우곡정(雨谷停), 막야정은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 또는 북아량(北阿良)이라고 하였다.
육기정은 군사적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그 소재지가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성군과 상성군에 위치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군(郡)과의 직접적인 영속관계는 없었다. 따라서, 대성군과 상성군은 다른 군과는 달리 영현(領縣)이 없이 육기정만이 소재한 군이 되었다.
육기정이 왕도인 경주 부근의 군사행정구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에는 대당(大幢)을 비롯해 왕도수비와 관련된 각종의 군단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육기정이 언제 성립하였는지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왕도의 육부제가 정비되고 대당을 비롯해 왕도에 배치되는 군단의 수가 증가하게 되자, 그것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성립되어 757년에 와서 육기정의 명칭이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육기정을 ≪양서 梁書≫ 신라전(新羅傳)에 보이는 육탁평(六啄評)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육탁평은 육부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육기정에 비정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