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읍은 신라 및 고려 초기에 관료들에게 일정한 지역의 경제적 수취를 허용해 준 특정한 지역이다. 녹읍제는 신라가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고 귀족층으로 편입된 각 세력들을 관료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귀족관료로서 대우하고 보수를 주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하지만 시행 시기나, 녹읍에서 조를 거두는 수조권만 있었는지 부역·공물 수취권까지 포함한 것이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초의 녹읍제는 개국공신과 귀순해 온 성주 계열 등 공경장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한정된 관료들에 대해 특별한 경제적 처우로 녹읍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녹읍제는 신라가 주변지역을 복속시키고 귀족층으로 편입된 각 세력들을 관료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귀족관료로서 보수 · 대우하려는 제도에서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시행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관료제도가 정비되는 삼국시기의 어느 시점, 혹은 관등제나 관료제의 정비와 관련 있는 율령(律令)의 반포에 주목해 6세기 전반부터 지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신라 중앙지배체제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의 6세기 무렵의 어느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의 녹읍은 689년(신문왕 9)에 폐지된 적이 있고, 757년(경덕왕 16)에 부활된 바가 있었다. 689년 이전에도 어느 때부터인가 녹읍제가 시행되어왔음은 확실하다. 755년 이후에도 녹읍제가 폐지되었다는 기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934년(태조 17)에도 녹읍의 기사가 보이고 있어 왕건(王建)이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도 녹읍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799년(소성왕 원년)에 국학(國學)의 학생들에게도 녹읍을 지급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녹읍의 지급 대상자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우선 녹읍이 폐지되기 이전에도 매년 일정량의 조(租)를 지급하는 세조(歲租)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녹읍은 귀족가문 출신에게, 세조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학식이나 행정능력 및 무예로 발탁된 관원에게 지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녹읍은 대아찬(大阿湌) 이상의 관등을 가진 진골(眞骨)귀족에게, 세조는 아찬(阿湌) 이하의 관등을 가진 육두품 이하에 지급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 관등(官等)과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모든 관료들이 녹읍을 받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내외관(內外官)이란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을 관등이나 관직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모두 아울러서 부르는 명칭이고, 녹읍의 폐지 · 부활 기사에 ‘진골’ 혹은 ‘일정한 관등 이상’의 관료라는 제한규정이 없는 점, 또 아직 정식 관료가 되지 못한 예비관료인 학생에게까지 녹읍이 지급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녹읍의 지급기준이 관등이었는지, 관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관직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관등이 고려되어 지급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 녹읍 대신에 지급된 월봉의 차이가 관등에 따라 매우 컸다는 점에서, 녹읍의 규모도 또한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이 컸다고 보고 있다. 녹읍의 지급방식에 대해서는 고관들은 현(縣)이나 촌(村)을 단위로 지급받으면서 여러 촌이나 현에 걸친 녹읍을 지급받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하위관료는 하나의 촌이나 현을 여러 명의 관료가 공동으로 지배하는 형식으로 지급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녹읍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큰 쟁점은 그 수취내용에 대한 것이다. 수취내용에 대한 연구는 관료전(官僚田)의 지급 및 녹읍의 폐지 · 부활 과정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녹읍제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주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에 집중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관료 내지 귀족들의 경제적인 토대와 정치적인 세력의 크기를 이해하고, 나아가 이들이 주도해간 당시 사회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 있어 녹읍제의 연구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에 관한 학계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녹읍제에 주목한 초기의 학자 가운데 하나인 백남운(白南雲)은 녹읍을 곧 식읍(食邑)으로 보았다. 그리고 녹읍제의 내용은 일정한 지역에 있어서의 징세권과 백성 및 토지의 영유권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 뒤 그는 견해를 바꾸어, 녹읍을 식읍과 구별해 일정한 치역(治域)에 있어서의 수조권(收租權)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단순한 추측 이상의 것이 못되었다. 한편, 노무라(野村忠夫)는 녹읍을 곧 관료전으로 이해해 그 처우의 내용이 관료전으로 지목된 토지에서의 조(租)를 수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확실한 논증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녹읍이 관료전과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나오게 되면서부터, 녹읍제의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강진철(姜晉哲)은 녹읍을 관료전과 동일시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첫째 관료전이 설치된 것이 687년 5월이었는데, 그 뒤 2년도 못되어서 689년 정월에 녹읍이 혁파되었다. 이것은 관료전이 설치된 지 불과 2년도 못되어서 없어졌다는 말이 되는데, 관료전의 실시가 신라의 토지제도사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큰 사업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둘째,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사해점촌(沙害漸村)에 있어서 내시령답(內視令畓)의 4결이 있는데, 이 액수는 촌 전체의 토지면적에서 40분의 1의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녹읍이 관료전의 설정지역이었다고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녹읍이 관료전과 동일시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녹읍으로 지정된 지역에서 조를 거두어가도록 허용한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 점은 일찍이 김철준(金哲埈)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나아가 고려초기 녹읍관계기록의 검토를 통해, 경덕왕(景德王) 때 부활된 녹읍은 수조권 뿐만 아니라 해당지역에 있어서의 노동력 징발권까지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강진철도 고려 초기의 자료를 가지고 녹읍의 실체에 접근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라의 녹읍은 수조권 및 노동력의 징발권 이외에 공부(貢賦)의 수취권을 포함시켜 일체의 수취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었다. 결국 녹읍의 지배는 단순한 토지에 대한 지배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지역에 사는 인간에 대한 지배라고 보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다만, 고려 초기의 기록 속에서 역역(力役)이나 공부의 수취의 가능성을 뒷받침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또한,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 초기의 사정이 신라의 경우와 똑같았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편, 다케다(武田幸男)는 촌락지배라고 하는 관점에서 녹읍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신라의 촌락문서가 바로 815년(헌덕왕 7)에 작성된 녹읍관계문서였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문서에 보이는 촌락들이 내성(內省) 또는 내시령(內視令)에 지급된 녹읍이었다. 그는 내성 · 내시령에 주목해, 촌적의 내용이 내성에 신고되었다는 점, 내시령이 내성의 장관이었으리라는 점, 내시령이 촌내에 식수를 하는 등 촌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그 논거로 제시하였다. 이 논거로써 촌락문서에 보이는 촌락들이 바로 내성 또는 내시령에게 지급된 녹읍이었다고 단정해도 좋은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지만 흥미있는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여하튼, 그는 촌적의 분석을 통해 인(人) · 호(戶)에 대한 노동력의 징발과 우마(牛馬) · 수목(樹木) 등의 징발 및 공납의 수취가 녹읍지배의 실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만, 그 징발과 수취의 정도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위의 견해들은 다시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녹읍의 지배내용이 녹읍으로 지급된 지역의 토지에서 조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에 한정되었다고 보는 견해, 조세를 제외한 공부 · 역역만을 그 수취대상으로 하였다는 견해, 조세 · 공부 · 역역 전반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통일신라의 녹읍 · 녹읍제에 관해 여러 학설이 있어 정설을 확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현재로서는 이 시대의 녹읍이 관료들의 경제적 대우의 하나로 주어졌으며, 구체적으로 녹읍제가 특정한 지역에서의 수조를 포함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수취를 허용한 제도였다고 이해해 두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한편 녹읍이 698년에 혁파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신라 중대왕권의 강화과정과 당나라의 율령체제 도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신문왕이 전제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진골귀족 세력의 경제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국가의 대농민 지배강화라는 시각에서 귀족관료들이 일정한 지역의 인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토지지배 질서를 부인하고 토지와 인민을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아래 두면서 율령체제의 전제를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녹읍을 혁파하고 문무관료전을 지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중대 집권세력이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면서 전국의 촌락과 일반 민(民), 그리고 토지에 대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관철시키려고 하면서 동시에 소농민 안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재정(財政) 기구의 정비 및 재정의 확보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녹읍을 폐하고 매년 조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재정 기구의 정비가 동반되었다. 문무왕대에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좌사록관 · 우사록관을 설치했는데, 녹읍 관련 업무도 여기에서 관장한 것으로 보인다.
녹읍이 폐지된 뒤 약 70여 년 후인 757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중대왕권에 대항하고 있던 진골귀족세력의 정치적 성장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이는 국가의 재정과 관련된 경제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관료들의 녹봉에 해당하는 수조권을 각 지역과 연계시켜 분급함으로써 행정상의 어려움을 줄이는 행정의 효율적 운용을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농민층의 궁핍과 유망(流亡) 등으로 인한 국가 재정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궁핍을 타개하기 위한 것, 혹은 관료들에 대한 경제적 대우를 충분히 하기 위해 전조 이외에 공부 · 역역까지 함께 지급함으로써 관료제를 안정시키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고려 초의 녹읍제는 통일 이전의 태조 치세에서, 주로 개국공신으로 대표되는 태조의 막료계열과 귀순해온 성주계열로서, 공경장상(公卿將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제5위의 원윤(元尹) 이상의 관료들에 대한 특별한 경제적 처우를 기약하였다. 녹읍제는 일반급여체계와는 별도로, 공훈자의 우대라는 명분으로 설정된 특별한 경제적 처우의 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고려 초의 녹읍의 지급은 특정한 지역에서 받는 녹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 특정한 지역은 귀순해온 성주의 본읍(本邑)과 일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녹읍의 지급이 귀순해온 성주들의 기존 지배권역(支配圈域)을 인정해주는 것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특정한 지역으로부터 녹이라고 해서 받은 것은, 그 지역에서 수취된 조세 가운데 일부로서 일정한 액수의 곡식이었다. 이것은 1년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되는 세록(歲祿)이었다고 믿어지며, 이 같은 내용의 녹의 수취가 허용된 특정한 지역이 고려 초에 있어서의 녹읍이었다. 그 지급은 실제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일정한 액수의 곡식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녹봉제(祿俸制)와 차이가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녹봉제와 구별되는 녹읍제가 설정되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왕권이 미약했던 초기의 태조로서는 고위관료들에게 상당한 처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에 특정한 지역은 녹읍으로 지급하는 형식을 취하는 일은 그만큼 효과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의 과업을 성취한 태조는 전에 비해 좀더 강력한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 녹읍제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태조가 통일을 이룩한 뒤에는 녹읍제는 폐기되었다. 다만, 공훈자를 우대한다는 명분은 그 뒤에도 공음전시제도(功蔭田柴制度)에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