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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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개념
역사 연구에서 실증적인 방법을 중시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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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 연구에서 실증적인 방법을 중시하는 학문.
연원

실증사학은 19세기 말부터, 특히 일제시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라도리(白鳥庫吉)·이케우치(池內宏)·이마니시류(今西龍)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1920년대까지도 활발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한국인 학자들이 등장해 실증사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상백(李相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연구활동은 해방 뒤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이후가 되면 실증사학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 학자들의 실제 연구에서 실증사학의 영향이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내용

실증사학의 특징은 연구 방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실증을 중시했다는 점에 있다. 실증이란 실제적인 증거라는 뜻이고 실증적인 방법이란 그러한 증거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실증사학자들이 가장 중시한 증거는 정확한 문헌자료였다. 문헌자료라고 해도 이들이 추구한 것은 정확한 사료였다. 정확한 사료를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사료비판에 철저하였다.

사료비판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기준은 합리성 여부였다. 즉, 실증사학자들은 합리성 여부를 기준으로 정확한 사료를 확보하는 사료비판과 나아가 그 사료를 증거삼아서 역사적 사실을 해명하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사료비판과 사실해명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선후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과정이다. 이들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물론이다. 실증사학자들의 실제 연구에서도 그러한 작업의 면모는 뚜렷하다.

그러나 같은 실증사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연구의 경향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시라도리 등 1세대 학자들이 사료비판을 더 중시했다면, 이병도 등 2세대 학자들은 사실해명에 더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사료비판은 사실해명의 전제가 되는 것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역사 연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실해명에 있다.

따라서 1세대에 비하여 2세대 학자들이 사실해명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발전을 뜻한다. 사실해명의 단계에 나아가게 됨으로써 한국사 연구는 비로소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의 해명에 있어서 실증사학자들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었다.

첫째로 실증사학자들은 개별적 사실을 개체적·독립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실증사학자들은 특정한 지명이나 연대를 고증하는 일이나 어느 한 인물에 대한 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 사실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다른 사실과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예가 많았다. 이것은 개별적 사실을 개체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적 태도를 반영하여 주는 일이다.

둘째로 실증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변화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시간의 선후 관계를 따져서 사실들을 인과관계로 이해하는데 철저하였다.

예를 들면 특정한 사건·제도·사상 등 사회적 현상을 먼저 발생·유래·연원을 따지고 다음에 과정·경위·전개 따위를 알아보고, 끝으로 결과나 영향을 지적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시한 것은 결과보다는 원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기원을 찾아서 유래를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셋째로 실증사학자들은 정치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정치사 가운데서도 정치를 끌고 가는 군주와 귀족들이 중시되었다. 지배자 중심의 역사인식은 실증사학자들에게 있어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지배자의 정치적인 동향이 무엇보다도 커다란 관심사였던 것이다. 대외관계를 크게 주목했던 것도 그들의 연구에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변천

실증사학자들의 연구는 그 뒤를 이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예를 들면, 다음 세대의 학자들은 개별적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것을 전체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은 변화와 함께 지속되는 면에도 크게 유의하였다. 일정한 시대에 지속적으로 기능하는 여러 제도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러한 새로운 학풍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외관계는 후계자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단순한 문물과 제도의 전래가 아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필요와 용의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한국사의 전개에 있어서 내재적 발전의 요소를 더 내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증사학자들의 연구 가운데 비판의 여지가 없이 계승된 대목도 있다. 실증적 연구방법과 사실을 객관적으로 엄정하게 확정해야 한다는 연구 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그만큼 시대를 뛰어 넘어서 이어질 만큼 높은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된다.

사실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점은 한국 역사학이 근대 역사학으로 거듭나는데 전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실증사학은 역사연구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학의 발전에 끼친 기여가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실증사학의 반성과 전망」(이장우, 『한국사 시민강좌』, 1996)
「한국사연구에 있어서의 사료와 실증」(이성무, 『한국사연구』 91, 1995)
「실증사학론」(홍승기, 『현대 한국사학과 사관』, 일주각, 1991)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발달 2-1930·1940년대의 실증주의 사학-」(김용섭, 『문학과 지성』 1972년 가을호)
「사회경제사학과 실증사학의 문제」(이기백, 『문학과 지성』, 1971년 봄호 : 민족과 역사 신판 중판, 일주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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