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토지제도이다. 722년(성덕왕 21) 백성 가운데 정의 연령층에게 주어졌던 토지이다. 정전의 지급은 백성들의 사유지를 법제적으로 추인해 준 조치임과 동시에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를 급여해 준 조처로 추측된다. 국유지 지급 내용은 경작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유권까지 넘겨줄 명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엄연히 사유지가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유권을 넘긴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전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722년( 성덕왕 21) 백성 가운데 정(丁)의 연령층에게 주어졌던 토지이다.
정전으로 지급된 토지의 성격과, 이와 같은 조처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일은 당시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지배관계, 나아가 국가의 농민에 대한 지배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정전관계 기록이 별로 전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문제의 구체적인 검토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다행히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의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가 발견됨으로써 정전관계 자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 민호가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가지고 있는 전 · 답)을 국가에서 농민에게 수여한 토지로 이해하고, 결국 백성에게 지급되었다는 정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요컨대, 백성에 급여된 정전이 연수유의 토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실로 균전제(均田制)나 토지의 수수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연수유전답의 면적이 각 촌에 균등하지 않았다는 점, 호구(戶口) · 정수(丁數)와 아무런 대응관계도 없었다는 점, 그 증감에 대한 어떠한 기재도 없었다는 점 따위를 들어 연수유의 토지가 균전제에 의해 배분된 토지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토지의 수수도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 견해는 정전의 급여가 당대(唐代) 균전제와 같은 토지의 수수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래부터 농민들이 보유해 오던 경작지를 어떤 법제적인 절차를 거쳐서 국가가 농민에게 반급해준 것처럼 형식을 취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정전제의 실시를 수(隋) · 당대(唐代) 균전제(均田制)의 모방 · 채택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정전이 정년(丁年)에 달한 남녀에게 반급하는 구분전(口分田)을 일컫는 것으로,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연수유전이 그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당나라의 향리제(鄕里制)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전의 급여가 자연촌락제(自然村落制)를 전제로 한 균전제의 실시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서 토지수수의 기준은 이른바 개별 촌락적 기준이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 입각하여 급여된 것이 정전 또는 연수유전이나 구분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정전으로 지급된 토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전의 지급을 개별 보유지의 법제적 추인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그 지급대상이 된 토지가 애당초 사유지였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전의 급여라는 사실로 균전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견해는 그것이 국유지였다고 보는 입장이다.
정전이 곧 연수유전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사유지였는가 아니면 국유지였는가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만일 연수유전답을 사유지로 볼 수 없다면,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토지 가운데에는 사유지가 하나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나머지 관모답(官謨畓: 신라시대 각 촌락에 분산된 국가 소유의 답) · 내시령답(內視令畓: 내시령에게 지급한 답) · 마전(麻田: 신라시대 촌락에서 삼을 재배하던 밭)은 틀림없이 국유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4개의 촌락에서 사유지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통일신라시대에 귀족계층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반 농민층에 있어서도 사유지가 존재했음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그렇다고 연수유전답의 전부가 사유지였는가 하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촌락문서에 보이는 연수유전답의 총면적은 564결(結) 8부(負) 5속(束)이었다. 관모답전 · 내시령답 · 마전의 총면적은 22결 3부 7속이었다.
전자가 전체 토지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6.25%였다. 국유지로 추정되는 후자의 비율은 3.75%였다. 국유지의 사유지에 대한 비율이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관모답전 · 마전이 촌마다 대체로 비슷한 크기로 설정되어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토지 설정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유지가 촌마다 그렇게 비슷한 크기로만 있어 왔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 이외의 국유지가 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그렇다면, 나머지 국유지는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일정한 크기의 관모답전 · 내시령답 · 마전을 떼어놓고 그 나머지의 국유지는 연수유전답으로 돌려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수유전답에는 사유지와 함께 국유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전의 지급은 백성들의 사유지를 법제적으로 추인해 준 조치였음과 동시에,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를 급여해 준 조처였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국유지의 지급내용은 경작권이었을 것이다. 소유권까지 넘겨줄 명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엄연히 사유지가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소유권을 넘긴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그러나 정전을 받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또한 경작권을 지급받은 뒤에 국가에 대해 어떤 부담을 지게 되었는가 하는 따위는 여전히 잘 알 수가 없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로서,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