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중앙정부가 각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이다. 전조(田租)와 함께 중앙 재정의 양대 영역이었다. 태종 대 공부를 개혁하여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정립되었다.
조선시대에 중앙정부가 지방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하던 현물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에 대동법이 성립되어 현물 수취 제도가 끝나면서 공부는 한국사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세목(稅目)에 대한 법 규정이 존재하기 않았기에 공부의 내용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려시대 공부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기타 사료들에 보이는 세목(稅目) 명칭의 용례 분석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용례 분석에 따르면 고려시대 공부의 내용은 3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전조(田租)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중앙정부가 군현에 부과하는 공물이라는 주장이고, 세 번째는 부세 일반을 뜻한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는 매우 드문 사례이기에 공부가 전조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세번째는 용례가 적지 않고 또 그에 동의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공부가 부세 일반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공부가 독자적인 세금 항목임을 부정하고 세금 전반을 뜻하는 수사적 의미를 띤다고 본다.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공부는 중앙정부가 군현에 부과하는 공물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추세이다.
고려시대 사료에 나오는 공부 품목은 매우 다양하다. 황금(黃金), 백금(白金), 백적동(白赤銅), 철(鐵) 등 각종 광산물, 소가죽, 소 힘줄, 소뿔, 말, 술과 고기, 곰발바닥[웅장(熊掌)], 표범의 태반태[표태(豹胎)], 맹수의 가죽, 밤, 잣, 약재, 생강, 시탄(柴炭), 송연(松烟) 등 동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미역, 김, 소금 등 해산물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종이, 기와, 먹, 도자기, 옹기 등 수공업품, 세포(紬布), 세저포(細苧布), 세마포(細麻布), 설면자(雪綿子), 비단[綾], 황마포(黃麻布) 등 직물류가 있다.
공부 품목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뉜다. 하나는 뛰어난 가공 기술이 필요한 물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원재료, 혹은 반제품 형태의 물품들이다. 전자는 고려시대의 특수행정 구역인 소(所)에서 생산되었고, 후자는 일반 군현민에게 부과되어 수집 혹은 채집되었다. 소의 주민들은 특정 생산품을 생산하는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이 생산을 돕기 위하여 생산 과정에 필요한 각종 역을 담당하는 은호(銀戶), 염호(鹽戶), 묵호(墨戶)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전체 부세 체계에서 공부가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의견들이 있다. 『고려사』는 고려의 세금 제도가 당나라 제도인 조(租) · 용(庸) · 조(調)를 수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일선 군현이 민호에 부과하는 세목은 조(租) · 포(布) · 역(役)으로 요약되었다. 포괄적으로 언급한 조 · 용 · 조와 구체적 세목인 조 · 포 · 역을 비교하면, 토지 생산물에 과세를 부과함을 뜻하는 조(租)는 일치하고, 용(庸)과 역(役)은 노동력 징발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문제는 조(調)와 포(布)가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충돌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고려시대 기본 세목(稅目)을 두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있다. 첫 번째 입장은 기본 세목을 조 · 용 · 조 3세(稅)로 파악하는 견해이고, 두 번째 입장은 여기에 공부를 더해서 4세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에 문제는 조 · 용 · 조와 조 · 포 · 역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전자는 고려의 수취 체계를 두 단계로 나눈다. 즉, 조 · 용 · 조는 국가가 군현에 부과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조 · 포 · 역은 군현이 민호에 부과하는 부담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군현은 민호에서 수세한 조 · 포 · 역으로 공부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내용적으로 조 · 용 · 조와 조 · 포 · 역을 일치시켰다.
두 번째 입장은 공부를 조 · 용 · 조 혹은 조 · 포 · 역과 별도로 운영된 전혀 다른 세목으로 보았다. 3세 이외에 부과되는 일종의 지방세로 보았던 것이다. 즉 소에서 생산되는 것과 일반 군현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획득된 두 가지를 공부의 내용으로 보았고, 조(調)나 포(布)는 공부와 무관하다고 보았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당나라에서도 역시 조 · 용 · 조의 기본 세목 외에 지방 관청에서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공헌(貢獻)이 있었다. 공헌과 조(調)의 차이는 공헌이 직물류를 포함한 다양한 지역 특산물 수취인데 비해, 조는 직물류에 한정해서 수취하는 품목이었다. 사실상 고려시대 포와 공물의 관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공부가 국가기구 작동을 위해 수취하는 현물 과세라면, 공부는 국가기구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가 국가의 ‘제도’ 혹은 ‘수취 체제’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더 분명한 출발 기준이 필요하다.
공부는 전조(田租)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현물을 의미한다. 국가기구가 필요한 현물을 수취함에 있어서 전조 이외 현물 수취를 제도적으로 구분한 때를 공부제도의 시초로 보아야 한다.
반대로 한국사에서 현물 수취 제도의 끝, 즉 공부제도의 끝은 대동법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대동법 성립 이후에도 국가가 수취하는 현물들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당대의 기술적 조건이나 시장 상황과 관련된 일이다. 그럼에도 대동법 성립으로 현물 수취 과세 범주로서 공부가 끝이 났다고 보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조(租)와 구분되는 현물 과세의 등장 시기는 아마도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다. 584년(신라 진평왕 6) 조부(調府)가 설치되고, 전조를 수취하는 창부(倉部)가 636년(선덕왕 5)에 설치되었다. 흥미롭게도 창부보다 조부의 설치가 빨랐다.
그 이유를 사료에서 찾기는 어렵지만 두 가지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전조를 수취하기 위해서는 경작지 측량인 양전(量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양전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물자에서 실제로 공물의 중요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수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 공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더 이상 확인하기 어렵다.
고려 초 공부가 제도적으로 실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등장한다. 『고려사』 권 78, 지(志) 32, 식화(食貨) 1, 서(序)에 “ 광종(光宗)이 주현(州縣)의 공부(貢賦)를 정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광종은 즉위(949)하자 제일 먼저 공부를 정하였다.
그런데 12세기 이전 고려 전기의 공부 운영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공물이 특수행정 구역인 소(所)와 일반 군현민의 부담으로 마련되고, 각 군현의 관부가 중앙정부에 납부했다는 점, 1066년(문종 20)부터 군현민이 부담하던 공물들 중 일부 품목들을 포로 대납하는 일이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점 정도이다.
매년 부담하는 상공(常貢)이었던 소의 가죽 · 힘줄 · 뿔 등은 현물 대신에 평포(平布)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각 군현이 부담하는 세공액(歲貢額) 가운데 현지에서 생산할 수 없게 된 물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대동법 성립 이전에 있었던 일로써, 현물 과세 체제에서는 언제나 있는 일이다.
12세기 예종(睿宗) 대부터 공부와 관련하여 여러 사회적 현상들이 나타났다. 가장 뚜렷한 현상으로 권세가들의 토지 탈점과 민의 유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불산공물(不産貢物) 문제가 발생하였다. 공부의 최종적 부담자인 민이, 살던 지역을 떠나면서 그 지역에 부과되던 현물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가 공부를 거두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재정이 약화되었다. 결국 정부는 공부의 대납(代納)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제조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공물을 제공하던 소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종래 소에서 생산되던 물품을 일반 군현의 주민에게 부과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현상, 즉 대납의 허용과 소의 해체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진행되었다. 소에서 생산되다가 일반 군현민에게 전가된 공물들은 어차피 생산하는 데에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일반 군현민이 만들기는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공물 대납이었다.
공물의 대납은 기존 조 · 포 · 역 3세 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공물 대납이란 곧 직물류의 포납(布納)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로써 대납한 공부인 포와 조 · 포 · 역 안의 포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이 과정에 12세기부터 상요(常徭)와 잡공(雜貢)이 새로운 현물세로 등장하였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부터는 민이 부담하는 세목이 3세(稅), 상요, 잡공으로 표시되었다. 3세는 기존의 조 · 포 · 역이고 여기에 상요와 잡공이 첨가되었다. 기존의 공물이 대납되었지만, 정부는 여전히 현물이 필요하였고, 그것이 상요와 잡공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상요와 잡공은 지방 관청을 부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공물에 다름 아니었다. 잡공은 호를 대상으로 부과되었고, 품목도 포류를 비롯한 잡다한 물품이었다. 상요와 잡공의 수취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가하였다.
고려 후기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으로 공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정역호(定役戶) 증가와 전세공물(田稅貢物)의 등장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들이 공부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공부와 별 차이가 없었다. 두 가지는 포괄적인 차원에서 공부로 볼 수 있는 범주이다.
정역호는 국가에 대한 신역(身役)으로 특정 정부 기관에 입역하여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특정한 현물을 납부하는 존재들이었다. 국가는 정역호가 납부한 현물을 공물로 인식하였다. 정역호의 공물과 노동력이 지방 군현을 통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부라 하기는 어렵다.
한편, 전세공물은 전세조공물이라고도 부른다. 전세는 전조를 말하는데 토지 생산물에 대해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어떤 경작지는 몇 가지 이유로 전조 대신에 공물 종류에 해당하는 현물을 납부하였다. 말하자면 납부의 범주로는 전세지만 납부하는 물품은 공물이었다. 전세공물 역시 정부 입장에서는 공부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고려 말 과전법을 만들기 위하여 1389년(우왕 14)에 실시한 기사양전의 결과, 정부는 62만 결의 실전(實田)을 얻었다. 기사양전 당시 전세공물 규모는 10만 결 이상이었다.
62만 결을 배분하면서 관리들의 녹봉을 책임지는 광흥창[좌창]에 10만 결, 제사 · 접빈객 · 사냥 · 구황 등 ‘국용(國用)’으로 불리는 것들을 책임지는 풍저창[우창]에 10만 결이 책정되었다. 또 과전(科田)과 공신전 전체에 12만 결이 책정되었다. 이렇게 보면 전세공물이 적어도 10만 결 이상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지닌 것인지 알 수 있다.
어디까지를 공물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이다. 최종적 쓰임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각관 관부를 통한 수취처럼 수취 방식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궁극적인 부담자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기준을 생각한다면 전조 이외의 나머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역호나 전세공물도 넓은 의미의 공물로 볼 수 있다. 경기선혜법이 1664년(현종 5) 충청도와 전라도 대동사목에 맞추어 재정립될 때 전세공물은 대동미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공부는 현물세로서의 성격을 잃었다. 이는 전세공물을 공물로 보아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조선은 건국 전에 이미 과전법을 성립시켜서 새로운 전조에 대한 입법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고려 말의 공부 상황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공부에 대한 전면적인 개정은 태종 말년에 시작되었다.
태종은 집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가지 재정적 과제를 맞았다. 하나는 군량 확보를 위해서 미곡 비축량을 늘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역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촉발되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과 명나라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1402년에 즉위한 영락제는 곧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조선을 침공할 경우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논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병력과 군량(軍糧)이었다.
태종 대에 추진된 미곡 및 병력 확보 노력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공물을 조달하던 정역호와 전세공물을 내던 전결을 새롭게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대략 15만 결의 위전과 4~5만 명의 정역호가 더이상 공물을 조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가 받아들이던 공물의 총량이 크게 축소되었다.
태종 집권기 중반부터 공안 개정 논의가 등장하였다. 방향은 공안을 개정하여 부족해진 공물의 부족분을 각 관서의 공물을 증액하여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세종 즉위 후 마무리되었다. 결국 각 관서에 부과하는 공물 총액이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만들어진 세종 대의 공안은 이후 세조 대 1465년(세조 11)에 을유공안이 수립되기 전까지 조선 공납제 운영의 토대가 되었다. 공물 총액만 증가하였던 것이 아니다.
이때 공물의 기본 틀이 확립되었다. 고려 말 공부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포(調布), 상요, 잡공, 정역호 공물, 전세공물 등이 그것이다. 태종 대 개혁은 이 모두를 공부로 통일하였고 그것을 조(調)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조(調)의 내용이 달라졌다. 즉, 고려시대 조(調)가 포(布)의 수취를 의미하였다면, 이제 공부, 즉 공물을 의미하는 조(調)로 전환되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조(調)를 공물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 조(調)에 대한 개념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이렇듯 나중에 형성된 개념으로 이전에 있었던 현상을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일이다.
공부의 수취 기준과 수취 방식의 변천 내용은 공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부는 지방 군현의 관부가 납부 책임을 지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관부가 포괄하는 영역 내의 민호가 감당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공물을 부과하였다. 이때문에 호구(戶口)를 파악하는 방식은 고려시대에 공부를 부과하는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1292년(충렬왕 18), 1310년(충선왕 2) 등 몇 차례에 걸쳐 공부의 부과 기준에 호의 인정뿐 아니라 토지 소유 정도를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 조준은 호마다 인정을 배제하고 토지 소유 규모만을 기준으로 역을 동원하자고 상소하였다. 하지만 그의 상소는 권문세가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조선 초에도 역[공부]을 동원하는 기준을 놓고 갈등이 지속되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세력들은 토지가 역 분정(分定)의 기준이 되는 것에 극구 반대하였다. 하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인정은 현실적으로 역을 부담할 수 없었다. 1435년(세종 17)에 이르러, 각 호가 소유한 토지 결수 규모에 따라 5등호로 호적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조선은 건국 후 40여 년 만에 최종적으로 토지를 요역 분정 기준으로 확정하였다.
5등호제가 요역 분정 기준을 토지로 확정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지만 실행 규정이 되지는 못하였다. 등호에 따른 공물 부담량이나 부담률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471년(성종 2)에 요역의 분정 기준으로 마련된 역민식(役民式)이다. 그 내용은 모든 수세전에서 8결마다 1명의 역부(役夫)를 징발 사역하며, 사역 규모가 커서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경우에는 6결에서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민식은 이 내용 그대로 『경국대전』에 법문화되었다.
공물에는 크게 상공과 별공(別貢)이 있었다. 상공은 해마다 정해진 양으로 특정한 고을에 부과되는 공물이다. 그에 비해 별공은 상공과 같은 종류의 공물이 횟수와 수량을 달리하여 1년에 몇 번이라도 부과되는 것이었다.
각 고을에서 공물을 부담하는 실제 양상은 “매 8결(結)에서 1부(夫)를 내게 하되, 관찰사가 공역(功役)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돌려 가면서 조발(調發)하게 한다.[매팔결출일부(每八結出一夫), 관찰사양공역다소(觀察使量功役多少), 순환조발(循環調發), 『성종실록』권9, 성종 2년 3월 19일]”이라고 규정되었다.
위에서는 관찰사라고만 나왔지만 그와 함께 공물 납부의 실무 책임자는 고을 수령이었다. 특정한 공물이 고을에 부과될 때마다 수령은 고을이 관할하는 경작지의 8결 순서에 따라 차례로 공물을 부과하였다. 전결이 많은 고을은 1년에 1차례도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전결이 적은 고을은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공물을 부담하여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위 역민식은 요역에 대한 규정인데 왜 공물 분정에 대한 규정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공물과 요역이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련하는 입장에서는 노동력 징발이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 노동력의 결과물인 현물이기 때문이다.
역민식 이후 각 관서에서는 ‘8결윤회분정’[8결 단위로 윤회하여 공물을 분정하는 방식]으로 공물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물을 이 방식으로만 마련할 수는 없었다. 공물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소에서 생산하던 공물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물품을 만들거나 마련하기 위해서 ‘제역(除役)’이라고 하던 방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법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앙정부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제역은 8결 내에서 순환하면서 공물을 부담하는 것에서 빠져, 특정한 물품의 납부를 전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공물은 ‘8결윤회분정’과 ‘제역’의 두 가지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공물을 최종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제역에 비해 8결윤회 방식은 문제가 더 많았다. 1년에도 여러 차례 각 관서에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공물들 값이 매번 똑같기는 어려웠다. 8결윤회분정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공물가를 납부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차례에 무거운 부담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더구나 수령과 가깝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은 순서에서 건너뛰거나 부담이 가벼운 공물을 납부하였다.
그에 반해 제역은 미리 정해진 공물을 정해진 전결에서 거두었다. 제역으로 공물은 더 효율적으로 마련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각 고을이 납부하여야 하는 모든 종류의 공물을 제역 방식으로 마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대동제역’이 그것이다.
대동제역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것이 널리 실시되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제역은 ‘대동’이 등장하는 데 개념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각 관서에서 공물을 마련하는 데 ‘대동’ 개념에 해당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은 정철(鄭澈)이다.
그는 제역처럼 공물마다 그에 상응하는 전결을 정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주장하였다. 즉 각 관서의 공물가 전체를 각 관서의 전결 전체에 나누어 분정하는 방식, 그래서 각 관서 안의 모든 전결이 단위 면적당 같은 공물가를 부담하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이것을 각 고을에 그치지 않고 도(道) 단위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유성룡(柳成龍)이다. 이 방식은 실제로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대동법 성립 직전인 인조 말년에는 대다수 고을이 이런 방식으로 공물을 마련하였다.
정철과 유성룡이 주장하던 것을 학계에서는 ‘사대동(私大同)’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료에는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사대동’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사료에는 ‘대동(大同)’으로 나온다. 사대동이라는 용어는 효종 이후 정식으로 입법(立法)된 대동법과 대비하는 차원에서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대동’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여 정철과 유성룡이 그 실시를 주장한 내용이다. 말하자면 민간의 관행으로 실시되던 대동이, 효종 이후 입법 과정을 통해 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바로 대동법이다.
공부는 전조와 함께 중앙정부 재정의 양축을 구성하는 과세 범주였다. 전조가 경작지라는 측량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몇 종류의 미곡 수취로 작동되었다면, 공부는 곡물 이외의 거의 모든 현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 재정에서 차지하는 몫이 전조 이상이면서도 그 범주의 확정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시대 다양한 사회적 ·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변모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의 영역으로 확립되었다.
현물 과세로서의 공부는 대동법으로 공물이 전세화되면서 마감되었다. 하지만 외면적 모습은 종식되었지만, 대동미와 대동포가 중앙정부 각 관서의 경상비로 지급됨으로써 그 전통적 기능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