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끈 의병장이자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박춘무가 청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이후 닦아온 지역 기반에 힘입었다. 특히, 아버지 박기정 대에 학문과 사회경제적으로 집안이 일어났다.
주요 활동
당시 박춘무의 거주지는 청주 복대리(福臺里: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였다. 의병진은 청주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7월 초 이곳에서 출정식을 하였다. 박춘무의 의병진 규모는 대략 1,0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 종사관으로 활약한 사람이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과 한혁(韓赫)이다.
조헌은 서문을 공격하고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송제민, 조헌, 박춘무의 연합작전은 청주성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청주성 싸움을 시작으로 좌의대장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여 조헌의 좌의대는 700여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박춘무는 진천(鎭川)으로 나아가서 진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병사를 진천으로 옮겨 적을 열흘이나 포위했는데,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이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힘이 부친 박춘무가 포위를 풀려고 하자 지역민이 와서 만약 포위를 풀면 백성들이 왜군에게 살육을 당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박춘무는 그날 밤 남쪽의 포위망을 풀어 왜적이 달아나게 하였고, 후에 병사들로 하여금 왜적을 추격하도록 하여 진천 일대를 안정시켰다. 1597년 4월 임천(林川) 군수에 나갔다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1598년 4월에는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선조실록(宣祖實錄)』
단행본
- 이석린, 『의병장 박춘무 일가의 삼대창의록』(서경문화사, 2005)
논문
- 김강식, 「조선후기 청주 순천박씨 가문의 충의 정신과 의병 활동」(『우암논총』 3, 충북대 우암연구소, 2010)
- 이석린·전호수, 「화천당 박춘무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중원문화논총』 4집 1,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0)
- 이석린, 「임진왜란기 화천당 박춘무의 의병활동에 대한 예비적 고찰」(『중원문화논총』 2·3합집,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199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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