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5년 문과에 급제하여서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문한직(文翰職)과 보령 현감, 사헌부지평, 홍문관지평, 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604년 겨울에 있었던 장흥 병영 이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는데, 이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고, 관직 생활을 일찍 마감하는 원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전라병영이 강진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 이를 장흥으로 옮겼다. 이때 병영을 본래대로 강진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 사헌부 집의(執義)였던 강주에게 뇌물이 제공되었다. 그는 뇌물을 거절했지만 이 일로 3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결국 수뢰 혐의를 벗고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이후 58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지만 마침내 관료 생활을 마감하였다.
중년에 관직에서 일찍 물러나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당풍(唐風)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그도 이 조류에 충실히 동참하였다. 그의 시에서 사회 비판적 성격의 시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중년에 겪은 일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소북(小北) 당색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530수 정도의 시를 남겼다. 말년인 84세에 「논문장설(論文章說)」을 지었는데, 자신의 시와 문학에 대한 자평(自評)으로 볼 수 있다.
사망하자 임금이 별치부(別致賻)의 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