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집중(集中), 호는 죽오(竹塢)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헌선생(玄軒先生)으로 불리던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세칭(睦世稱),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두일당(逗日堂) 목첨(睦詹)이다.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하담(荷潭) 목수흠(睦守欽), 어머니 연안이씨는 이지남(李至男)의 딸이다. 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목취선이 장남이고, 아우가 목낙선(睦樂善)이다. 도승지 목장흠(睦長欽)의 조카이고, 영의정 목내선(睦來善)의 4촌형이다. 아들이 없어서 아우 목낙선의 장자(長子)인 목임종(睦林宗)으로 후사를 삼았다. 손자 목천성(睦天成)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1601년(선조 34)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1606년(선조 39)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근무하였다. 이듬해인 1607년 승정원 주서(注書),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正言) ·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냈다. 직언(直言) 때문에 배척되어 1617년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지방에 내려가기를 청해서 현 충청남도 천안 지역인 직산(稷山)의 현감이 되었다. 이것으로 공직의 이력은 마감된다. 이후의 상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1619년(광해군 11)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당시 46세였다. 목취선의 묘는 사천목씨 선영들 중 한 곳인 양주(楊州) 금촌(金村,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다.
사후에 예빈시 정(正)에 추증되었다. 5대손으로 대사간을 지낸 목만중(睦萬中)이 그에 대한 유사(遺事)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