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다는 평을 들으며 성장하였다. 1747년(영조 23)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59년(영조 35) 33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거쳐 1762년(영조 38)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으나 그해 임오화변(壬午禍變)에 관계되어 함경도 이원(利原)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1764년 성균관전적으로 복직하여 예조정랑, 병조정랑을 거쳤다.
1765년(영조 41)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역임하였으나 감사 홍낙순(洪樂純)과의 불화로 벼슬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와 17년간의 칩거에 들어간다. 이 기간에 목만중은 채제공(蔡濟恭), 정범조(丁範祖)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였고, 문우(文友)들과 함께 금강산 및 강원도, 평안도 등을 유람하며 기행문과 많은 시를 남겼다. 목만중은 채제공, 정범조와 함께 18세기 남인 문단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1786년(정조10)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차지한 목만중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으로 관직에 복귀하였고, 태천현감(泰川縣監)을 거쳐 병조참의・공조참의・병조참의・동부승지・우승지・돈영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 등에 제수되었다. 1806년(순조 6)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올랐으며, 다음 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1810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목만중은 정치적으로 남인 벽파에 속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공서파(功西派)의 입장에서 천주교인의 다수를 차지하던 남인 시파를 탄압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기경(李基慶)・ 홍낙안(洪樂安) 등과의 교유가 잦아졌다.
18세기 남인 문단의 주요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삼명시화(三溟詩話)』・『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등 당대 시화집에서 언급될 만큼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의 시문집인 『여와집(餘窩集)』에 수록된 시를 포함하여 현전하는 시는 모두 2,600여 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