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하(擎厦), 호는 송서(松西)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국한 강위빙(姜渭聘)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강중길(姜重吉), 할아버지는 강일신(姜一臣)이다. 아버지 강책(姜𣽤)과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남홍빈(南洪儐)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중룡(李重龍)의 딸과 혼인하였다.
1773년(영조 49) 안동부 춘양현(春陽縣) 법전리(法田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에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 강협(姜浹)에게 학문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정조(正祖)가 강운의 학문적 깊이에 감명하여 그 이름을 어병(御屛)에 써놓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1807년(순조 7) 정시 문과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였고, 그해 10월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다. 이후 지평, 정언 등을 거쳐 1830년(순조 30)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1811년(순조 11) 류범휴(柳範休)가 주최한 고산서원(高山書院)의 강회(講會) 참석을 계기로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학문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3년(순조 23년)에는 도연서원(道淵書院)과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고 1824년은 봉산서원(鳳山書院) 강회에 참석하여 이야순(李野淳)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1828년 소수서원(紹修書院) 향례, 183년 사빈서원((泗濱書院) 강회에 참석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1832년(순조 32) 사는 곳에 서실(書室)을 짓고 종오헌(從吾軒)이라 이름하여 후학을 위한 강학과 저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1834년 봄, 화재로 인하여 소장하고 있던 경적(經籍)과 저서(著書)가 모두 소실되는 일을 겪었으며 낙심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그해 4월 죽었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와 『주서차의(朱書箚疑)』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시문집으로 10권 5책의 『 송서문집(松西文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