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건지(健之), 호는 광뢰(廣瀨). 이황(李滉)의 9세손으로 통덕랑 이구휴(李龜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인(舍人) 이약송(李若松)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이상정(李象靖)·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이황의 성리학을 전습하였다.
젊어서 부형의 권유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과장(科場)의 무질서와 폐습을 보고는 벼슬길을 단념, 일생을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특히, 『논어』와 『심경(心經)』에 몰두했고, 『퇴계서』 탐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796년(정조 20) 뇌석정(瀨石亭)을 중건해 이황의 저술들을 수집해 두고 그 연구와 강습으로 소일하였다. 1808년(순조 8)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추천으로 이듬 해 경기전참봉에 임명되었고, 1821년 국장도감감조관, 1831년 장악원주부에 승진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야순의 학문은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했고,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이야순은 성리학의 주요 명제나 자신이 체득한 것을 도설로 체계화하였다.
「심잠도(心箴圖)」·「인설전도(仁說前圖)」·「인설후도(仁說後圖)」·「염려사지의도(念慮思志意圖)」·「자수명도(自修銘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11개의 도표와 설명이 문집에 실려 있다.
이야순은 이황이 강의하고 이덕홍(李德弘)이 정리, 편찬한 『주자서강록(朱子書講錄)』의 오류를 교정하고 보완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밖에 『도산연보보유(陶山年譜補遺)』·『예설유편(禮說類編)』·『요존록(要存錄)』 등의 저술과 시문집인 『광뢰선생문집(廣瀨先生文集)』 13권 7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