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는 1763년(영조 39) 통신사 조엄(趙儼)이 대마도에서 종자를 들여와 동래부에서 시험재배를 하면서 구황작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동래부사를 지낸 강필리(姜必履)는 고구마의 효용성을 주장한 이광려(李匡呂)의 뜻에 공감하였고, 그를 도와 1765년(영조 31)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였다. 강필리는 형 강필교(姜必敎)와 함께 고구마 재배서인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를 저술하여 고구마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서울에 거주하던 김장순(金長淳)은 호남에 거주할 때 고구마를 먹어 본 후 구황작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전국적 보급에 크게 관심을 두었다. 9년간 전라남도 보성에서 고구마를 재배해 온 선종한(宣宗漢)은 서울에서 김장순과 만나 자신이 가져온 고구마를 건네며 시험재배에 도움을 주었고, 그해 가을 수확에 성공하였다.
1813년(순조 13) 김장순은 고구마의 증식과 전파를 위해 선종한과 함께 재배법을 정리하여 『감저신보(甘藷新譜)』를 편찬하였다. 특히 호남과 서울에서의 실제 재배 경험을 통해 남북 간의 기온 차이를 재배 방법에 반영하는 등 『강씨감저보』의 오류를 수정하며 더욱 실용적인 고구마 재배서를 완성하였다.
김장순의 『감저신보』는 『강씨감저보』와 함께 1834년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종저보(種藷譜)』의 저본(底本) 역할을 하며 고구마가 전국적으로 재배되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