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 ·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 ·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 · 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쳤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사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 · 부제학 · 승지 ·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 · 한성부우윤, 예조 · 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 · 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했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 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