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옥(周玉), 호는 동어(桐漁) 또는 현포(玄圃).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4대손으로, 아버지는 승지 이득일(李得一)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성모(柳聖模)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이 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에 임명되었다. 1789년 정언이 되고, 1792년 영남에 암행어사로 나가 역전(驛田)의 세금과 시노비(寺奴婢)의 신공을 줄일 것을 청하였다.
1795년 대사간을 역임하고, 1804년(순조 4)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우윤 · 개성 유수가 되었다. 1810년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812년 한성부 판윤 · 형조 판서를 거쳐 이듬 해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1816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홍경래(洪景來)의 난 이후 마비된 장중위(壯中衛)를 폐지하고, 별친기위(別親騎衛)를 설치하였다.
1820년 이조판서를 거쳐 홍문관 제학 ·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 등을 지냈으며, 1824년 좌의정이 되어, 1828년 재용 절약이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1829년 심양 문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30년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하였다. 이 해 주청 정사(奏請正使: 주청사(奏請使)의 우두머리)로 부사 이지연(李志淵), 서장관 윤심규(尹心圭)와 함께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1년 서울과 지방의 무뢰배가 궁방과 아문을 빙자해 쌀 · 소금 등의 매매를 침탈하는 것을 금하도록 주장하였다. 1833년 영의정에 올라,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이므로 선택을 신중히 할 것을 청하였다.
1835년(헌종 1) 실록총재관에 임명되어 『순조실록』 편찬을 주재하였다. 1838년 영의정을 사직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은 검소하였으며, 업무 처리는 정성을 다해 주도면밀하게 말없이 실시하였다고 한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저서로는 『동어집』 · 『해영일기(海營日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