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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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과(小科)의 하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
제도/법령·제도
  • 시행 시기1393년(태조 2)|1438년(세종 20)~1444년(세종 26)|1453년(단종 1)
  • 시행처예조
  • 폐지 시기1894년(고종 31)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2년
  • 최종수정 2023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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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선시대 소과의 하나인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다. 고려 때에는 과거에 합격한 이를 '진사'라 칭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문과를 별도로 두고,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를 '생원', '진사'라 하고 이들에게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더욱이 조선 전기에는 신유학의 학풍을 따라 경학을 중시하여 진사시가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하였다. 진사는 문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음관이 될 수 있는 후보군이었다. 또한 지방의 엘리트 사족으로서 지방민 교화, 여론 형성 등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의

조선시대, 소과(小科)의 하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

#내용 고려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한 이들을 '진사'라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소과(小科)에 해당되는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사람을 지칭하였다.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에게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일정 기간 성균관에서 수학하면 대과(大科)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신흥사대부는 신유학의 학풍을 중시하여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직후 즉위 교서를 통해 태조는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진사시를 없애기는 어려워 1393년(태조 2)에는 생원시와 함께 진사시를 실시하여 99명을 선발하였으나, 1395년 진사시를 폐지하였다. 1438년(세종 20) 세종은 경학이 중요하나 글쓰기도 폐지할 수 없다고 하여 진사시를 복구했으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6년 만인 1444년(세종 26)에 다시 폐지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에 진사시가 복구되어, 과거 제도가 철폐되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까지 존속되었다.

생원진사시는 2단계 시험으로 향시(鄕試)복시(覆試)로 구분되었다. 1단계는 각 지방에서 치르는 향시와 서울에서 치르는 한성시가 있는데 여기서 700명을 선발한다. 2단계 시험인 복시는 서울에서 실시되는데 여기서 100명이 합격하여 진사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가 162회, 수시로 실시된 증광시(增廣試)가 67회로 모두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 진사시는 210회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배출 인원은 23,776명이었고, 현재 방목(榜目)이 남아있는 진사는 20,974명(생원은 19,675)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는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한 뒤 관직에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지만 문과에 실패하는 등의 이유로 무직의 사류(士類)로 남아있는 진사들도 있었다. 생원과 진사를 합해 약 6.4%만이 문과에 합격하고, 93.6%가량은 백패(白牌)만 가진 채 살았다. 스스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은 진사들도 마찬가지로 백패만 가진 채 무직의 사류였다. 이는 학교 시험을 단계적으로 거쳐 최종적으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학교제와 과거제가 별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진사는 무직의 사류였지만 면역(免役)의 특전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참봉(參奉)이나 교도(敎導) 등의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다. 지방 사회에서 여러 가지 기구를 조직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교(鄕校)서원(書員) 유생의 명부[儒案, 靑衿錄]를 장악하고 향촌을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섰다. 진사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의미를 넘어 지방 사회에서 유자(儒者)로서 행세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활용되었다. 진사의 자격으로 지방민의 교화에 나서고, 백성에 대한 통제를 거들었으며, 그 밖에도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 시설의 관리와 이용, 수령 등의 진퇴 등의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때문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한다 해도 진사가 되고자 하였다.

변천 사항

진사와 생원과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것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 유학자들이 사장보다는 경학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균관에서 앉은 순서로도 입증되는데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보다 사장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는 대체적으로 생원보다 높아졌다. 19세기 후반 생원과 진사를 비교해 보면 진사가 생원의 1.5배나 된다. 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대개 늙은 유생들을 '생원'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오히려 '진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유생들은 생원보다는 진사가 되기를 원했고, 진사를 보다 격이 높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원전

  • - 『고려사(高麗史)』

  • - 『경국대전(經國大典)』

  • - 『대전회통(大典會通)』

  • - 『태학지(太學志)』

  • 단행본

  • - 김창현, 『조선초기 문과급제자연구(朝鮮初期文科及第者硏究)』(일조각, 1999)

  • - 송준호, 『이조생원진사시(李朝生員進士試)의 연구(硏究)』(국회도서관, 1970)

  •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韓國의 科擧制度)』(집문당, 1994)

  • - 이성무, 『조선양반사회연구(朝鮮兩班社會硏究)』(일조각, 1995)

  • - 이준구, 『조선후기신분직역변동연구(朝鮮後期身分職役變動硏究)』(일조각, 1993)

  • - 임민혁, 『조선시대 음관연구(朝鮮時代蔭官硏究)』(한성대학교출판부, 2002)

  • - 최진옥, 『조선초기 생원진사연구(朝鮮初期生員進士硏究)』(집문당, 1998)

  • -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연구(高麗科擧制度史硏究)』(일조각, 1996)

  • 논문

  • - 조좌호, 「이조사마시고(李朝司馬試考)」(『성균관대학교 논문집(成均館大學校論文集)』 14·16, 성균관대학교, 1969·1971)

  • - 이홍렬, 「사마시(司馬試)의 출신(出身)과 방회(榜會)의 의의(意義)」(『사학연구(史學硏究)』 21, 한국사학회, 1969)

  • - 최진옥, 「15세기(世紀)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분석(分析)」(『청계사학(淸溪史學)』 5, 청계사학회, 1988)

주석

  • 주1

    : 시가와 문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 주2

    : 고려ㆍ조선 시대의 과거 합격자 명부. 우리말샘

  • 주3

    : 병역이나 부역(賦役) 따위를 면함. 우리말샘

  • 주4

    : ‘성리학’을 달리 이르는 말. 주자가 집대성한 데에서 이처럼 이른다. 우리말샘

  • 주6

    : 묵은 기구, 제도, 법령 따위를 없애다. 우리말샘

  • 주7

    :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 주8

    : 과거(科擧)의 문과와 무과를 소과(小科)에 상대하여 이르던 말. 우리말샘

  • 주9

    :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

  • 주10

    :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 우리말샘

  • 주11

    :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 우리말샘

  • 주12

    : 소과에 급제한 생원이나 진사에게 주던 흰 종이의 증서.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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