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와 조선 전기까지 대구군읍성(大丘郡邑城) 북문 밖에 있다가, 17세기 후기에 경상감영(慶尙監營) 서문 밖으로, 그리고 1922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향시(鄕市)이다.
임진·정유 양란 이전에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잡고 있을 당시에는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읍성 향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양란을 겪은 다음 경상좌·우도가 통합되고 감영이 읍성 위치에 정착함으로써, 대구는 영남지방의 정치·경제·국방의 중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에 오늘날의 태평로 일대에 있었던 대구장은 여러 가지 입지조건이 훨씬 좋은 서문 밖 인교동(仁橋洞) 근처로 이전되었다. 그것은 경상도에 대동법이 실시된 1679년(숙종 5) 전후의 일로 알려져 있다.
위치가 감영 서문 밖이기 때문에 대구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장을 서문 밖으로 이전할 때 많은 사람들은 환영했으나, 북문시장 상인과 일부 유림들은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 밖으로 이전한 대구서문시장은 1923년부터 오늘날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이사하기까지 200여 년 동안 그곳에 정착하면서 놀랄 만큼 발전하여, 조선 후기 우리 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번창하였다. 그 원인은 다음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① 감영이 정착함으로써 대구가 영남지방의 정치중심도시로 승화하였다. 이에 따라서 각급 관인들의 수효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각급 관인과 일반백성들이 빈번하게 나들이하게 되었다. 사람은 어디서나 먹고 입어야 살 수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물자를 소비하게 마련이므로 이를 공급, 수요할 수 있는 곳이 곧 서문시장이었다.
② 교통이 매우 편리하였다. 대구는 천혜적으로 경상도의 심장부에 있으면서 육로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고, 낙동강 수운은 좌·우도 통합 이래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북녘(상류쪽)으로는 경상도 북부일대의 물자를 손쉽게 이곳으로 운송할 수가 있었고, 남녘(하류쪽)으로는 남해의 해산물과 왜물(倭物)이 실려 들어왔다. 왜물 중 그리쇠[鋼鐵]·납·유황·단목(丹木) 등과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③ 대동법 실시는 서문시장 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이 법이 1679년 뒤늦게 실시되기는 하였지만, 이 법이 실시됨에 따라서 종래 대납지폐(代納之弊)가 격심하였던 공물제(貢物制)·요역제(徭役制)가 원칙적으로 지양되었다.
백성들은 토지 1결에 대해서 쌀 12말 또는 피륙(무명 또는 삼베) 2필만을 수납하게 되었다. 대납지폐 등이 지양됨으로써 납세액이 줄었으므로 일반백성의 소득도 그만큼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해내려고 하는 의욕이 북돋우어졌던 것이다.
④ 일반백성들은 애써 생산한 물자를 이제는 공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대가를 갖고 그들이 꼭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이에 따라서 각 고을에는 크고 작은 향시가 생겼으며, 이러한 향시에는 전문상인인 보부상(褓負商)도 등장하여 희귀하고 값진 물자 중 많은 부분은 멀리 서문시장까지 가져다 매매하므로, 여기서 구입하지 못하는 물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로써 대구향시권이 형성되었다. 매월 매순 2일과 7일에 개시(開市)되는 서문시장을 기점으로 하여 18세기 후기에는 가까운 주변에 13개의 중소 향시가 개설되었다.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화원장·상시장·매원장·자인장, 매 4일·9일의 대구동문시장(새장)·남창장·하양장, 매 5일과 10일의 하빈장·경산장·해안장, 그리고 매 1일과 6일의 칠곡장·반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구향시권 안의 군소 향시들은 연중 쉴 사이 없이 장이 섰으므로 상품의 공급자·수요자로서의 전문상인과 일반백성들은 얼마쯤 가격원리에 입각한 정상적인 값으로 안심하고 거래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서문시장은 더욱 번창하였고, 다른 한편 원근의 향시권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이를테면, 대구·성주·영천·경주·의성·안동 향시권 등이 그것이다.
각 향시권의 심장부인 대구서문시장의 개시일에는 영남지방 사람뿐만 아니라 서울·평양·의주·원주·충주·공주·전주·광주 지방의 대상인이 찾아들어, 서로 원격지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비단 상품만이 아니라 시장 북로일대에 즐비한 여각과 객주집에 투숙하면서 온갖 애환과 정보도 교환하였다.
이처럼 번창하여 명성을 떨치던 서문시장은 1922년에 현재의 위치인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그것은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대구부에 의해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대구지방의 3·1운동은 흰옷을 입은 서문시장 장꾼들이 주도하였고, 식민주의자들은 흰옷 입은 군중이 시내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현재의 서문시장 터전은 당초에는 ‘성황당못’이라고 불리던 늪지대였다. 저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객토(客土)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내당동·비산동 고지대에 있던 고분군의 봉토를 실어다가 메웠다.
1923년 1년 동안의 총거래액 1만 4,500원(쌀 1말 3원, 지수 100.0)이던 것이 1928년 259만 5,768원(쌀 1말 3원, 지수 1,790.2)에 달하여서, 불과 5년 사이에 구시대의 서문시장의 명성을 되찾았다.
서문시장은 민족항일기 말기의 통제경제시대를 당하여 온갖 곤욕을 치렀고, 광복 후의 무질서 속에서 여러 차례 뜻하지 않았던 화재가 일어나서 많은 이재민을 내었다.
이어서 또 불행스러운 6·25전쟁을 치렀다. 휴전협정이 성립되자 전쟁 후의 특수경기를 맞게 되었다. 전통적인 섬유도시인 대구 주변의 각종 직물공업을 배경으로 하여 서문시장에는 전국 최대규모의 포목 도매·소매 시장이 형성되었다.
1957년 1일 평균 거래액이 2억 환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대구시의 15개 시장 총거래액의 4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6·25전쟁 후의 특수경기하에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사이에 여건이 격변하였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어온 최근 20∼30년 동안 서문시장은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는 힘이 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대도시의 중심지역에 있으면서 기존의 협소한 터전에 모여드는 인파를 감당하기도 힘들 뿐더러, 시장으로 진입하는 교통망이 좁고 불편해 교통체증을 이루기가 일쑤이다. 그러므로 많은 단골들은 백화점, 또는 변두리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