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부터 경상감영(慶尙監營) 안 객사(客舍) 주변에서 개시되어, 민족항일기를 거쳐 광복 후 얼마 동안까지 대구 ‘약전골목’ 일대에서 봄·가을 두 차례 개시되었다.
오늘날 대구약령시가 효종연간에 설치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발생요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주장이 있다. 약령시 발생요인에 대하여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한 일반적인 이론은,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수집하기 위하여 1658년(효종 9)에 관찰사의 명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설과, 중국 또는 일본에 무역품으로서의 한약재를 수집하기 위해 설치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조정용 한약재는 당시 각 지방에 수납하던 일반 공물 외에 연중 쉴새 없이 삭망진상(朔望進上: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하던 진상)·방물(方物:특산물 진상)·별례(別例)의 진상 명목으로 얼마든지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수요설은 근거가 희박하며, 설사 수납된 잉여물이 시전 상품으로 처리된다고 할지라도 이는 재정 수입용으로 전용된 것이므로, 조정용 한약재 조달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대중국·대일본 교역품조달설도 역대로 중국과 교역한 한약재는 인삼 이외에는 거의 없었으며, 대일관계에서도 기유조약 이래 한약재의 대일 수출은 잦았으나 과거 일본인들이 조일동화정책(朝日同化政策)의 일환으로 이러한 사실을 지나치게 역설하여 윤색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사회경제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봉건적 지배 질서의 뿌리가 흔들림에 따라 임진왜란 이전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향시제도는 전국 각처에 보급되었다.
관인의 강력한 억상정책(抑商政策)에도 불구하고 생산자와 수요자들은 교통이 편리한 일정한 곳에 모여 5일 간격의 시장을 형성해 갔다.
이러한 현상은 교환경제의 발달과 직업의 분화를 촉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교환을 전제로 한 각종 재화생산을 전문화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변혁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대동법이다. 1609(광해군 1)부터 1677년(숙종 3) 사이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동법은 이전의 상평통보와 함께 쌀과 직물을 공조(貢租)와 지대(地代) 수납 및 모든 물자 교환매체로서의 소재화폐(素材貨幣) 구실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처럼 화폐경제가 일반화함에 따라 교환경제는 더욱 발달하였으며, 그럴수록 직업은 더욱 분화하게 되었다.
대구약령시는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혁을 배경으로 발생한 것이다. 대구약령시가 전국에서 먼저 발흥하여 오래도록 큰 시장으로서 번창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구가 경상좌·우도 감영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좌·우도의 교통 요충지로, 특히 낙동강·금호강에 접해 있어 지역 안의 약재 등 각종 상품을 육운(陸運)·수운(水運)으로 수송하기에 가장 편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대구에 인접한 고령·성주·칠곡·선산·의성·군위·영천·경산·청도·합천 등 각 군·현과 안동·영양·봉화·예천·문경·상주·김천 및 경주 등 원격지의 각 부·군·현이 한결같이 한약재의 명산지이며, 나아가 이전 상공(常貢) 또는 별공(別貢)으로 관아에 수납하던 공물 몫도 대동법 실시 이후부터는 한약재를 일단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대내적인 민수용이든 관수용이든, 대외적인 교역용이든 한약재는 원칙적으로 시장을 통해 조달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여건은 대구약령시를 발흥시킨 결정적인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구약령시는 발흥 이래 약 300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역과 국가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계절대시(季節大市)로서 일 년 중 춘령시(春令市:음력 2월 1일부터 말일까지)·추령시(秋令市:음력 11월 1일부터 말일까지)에 개최되었는데, 이의 발전과정은 약령시가 이전된 1907년을 경계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효종연간부터 경상감영 서편 객사 주변(대구 중부경찰서 북편 일대)에서 전개된 시기로,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은 정해진 개시일 동안 대구읍성 사방의 관문을 통하여 출입하면서 상품을 매매하였다. 그것은 관인의 지휘와 통제를 받고 있는 약재의 객주(客主)·여각(旅閣) 및 거간(居間)의 중개 알선을 받으면서 거래되었다.
방법은 먼저 정선된 희귀 약재가 관수용으로 매상하고 난 다음 의원(醫員) 및 일반 민수용이 거래되었으며, 일본 상인의 출입은 엄격히 규제되고 있었다. 따라서 성곽 밖에 위치하여 연중 2일과 7일에 개시되던 서문시장과 4일과 9일에 개시되던 동문시장의 한 모퉁이에는 민수용 한약재가 대량으로 자유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전기에서의 거래 품목이라든지 거래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도시와 약령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07년 5월 약령시는 남문 밖 오늘날의 약전골목(남성로와 동성로 일부)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민족항일기 때의 대구약령시는 일제의 감시로 인한 생산자·상인들의 활동 제약과 1914년에 발동한 〈조선시장규칙〉에 의한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대구의 유력한 한약종상 양익순(梁翼淳)이 주동이 되어, 1923년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를 조직하여 공정거래·상업금융·운임 특혜·여관접대시설 개선 등 일대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총 거래액이 1914년에는 6만8000원(圓)에 불과하던 것이 1925년과 1926년 두 해에는 각각 77만5000원, 83만8000원으로 11∼12년 사이에 10여 배로 증대되었고, 1940년에는 161만 원에 달하였다.
약령시가 발흥하여 번창함에 따라 국내외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과 재화·용역에 의하여 지역사회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비단 약령시 자체뿐만 아니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되는 경제사회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멀리 일본·중국·몽고·동남아 여러 나라·중동 및 서유럽 각국에까지 영향을 줄 만큼 국제화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지닌 대구약령시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의 가혹한 통제경제하에서도 지속되었으며, 1949년까지 추령시가 개시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유습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을 계기로 약령시는 개시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약전골목’에서 상설 한약종상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1978년부터 대구한약협회 등이 대구약령시 부활운동을 벌여 매년 10월 문화의 달 행사 가운데 한 종목으로 약령시를 개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