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교관직 중 하나이다. 『고려사』에 동서학당을 설치하고 각각 별감·교학·교도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교도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교관 명칭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교도는 15세기 지방 향교의 학장제의 운영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태조부터 세조 연간에 생원과 진사 중에서 교육에 힘쓸 자를 선발하여 지방에 파견였던 교관직을 지칭한다. 15세기 교도제의 시행과 정비과정은 이후 훈도 직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교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의 교관직 중 하나였지만, 이 두 시대의 교도는 당시 학교 제도의 상이함을 고려하여 각기 다른 맥락에서 검토해야 한다. 『고려사』에 동(東) · 서(西)학당을 설치하고 각각 별감(別監) · 교학(敎學) · 교도(敎導)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교도가 동서학당의 교관직 중 하나였으며 이 교관직은 동서학당의 설립과 운영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15세기 조선의 교도는 태종- 세조 연간에 지방 향교의 설립 및 확대와 이에 따른 교관직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교관직으로서, 특히 15세기 향교 교관직이 학장제에서 훈도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제도라는 점에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제도이다.
조선시대 교도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태종 후반에 등장하며 세종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 예종 이후로 사라진다. 당시 교도직의 신설과 정비는 태종-세종 재위기에 있었던 지방교육체제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고, 그 변화는 다름 아니라 조선 초기의 향교 건립과 지방 교관직의 정비와 관련이 있었다. 『전국향교현황조사』와 『문화유적총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하면, 15세기 329개의 향교 중 50여개의 향교가 세종 전후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향교 건립 정책의 적극적 추진은 그에 걸맞는 교관 체제의 수립이 마련되어야 했다.
조선 초기 지방의 향교 중에서 부(府)나 목(牧)과 같은 큰 고을에는 교수관(敎授官)이 파견되었지만, 규모가 작은 군현에는 아직 향교가 세워지지 않은 고을도 있었고, 향교가 있어도 문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지방관이 자치적으로 학장(學長)을 선임하여 고을의 문교를 돌보게 하는 곳이 다수였다. 학장은 녹을 받는 관인이 아니고 일종의 명예직의 성격이 강한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적 성취와 교육활동과는 별개로 그들에 대한 평가와 관리에는 용이하지 않은 제도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문관 중에 훈도(訓導)를 지방교관으로 파견하자는 논의가 나오지만, 향교의 정비와 문관 제도의 정비가 진척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에 태종대 이러한 학장제 운영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생진(生進) 중에서 향교 교육을 담당할 교원을 차출하여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교도(敎導)라 칭하였다.
교도제는 세종대 누차에 걸친 개혁의 과정을 거쳐 정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418년(세종 즉위년) 12월 17일 500호가 넘는 고을에 교도를 두도록 하고 아록전(衙祿田)이나 관둔전(官屯田)을 재원으로 하여 교도에게 월봉(月俸)[삭료(朔料)]을 지급함으로써 녹관(祿官)의 수를 늘리지 않고 필요한 향교 교관을 충원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문관의 수를 늘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점차 교도의 수를 늘려 학장을 대체하겠다는 정책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1423년(세종 5) 4월에 지방 교관 자격 기준과 수급 방법이 재정비된다. 그 내용을 보면, 권지(權知)로서 임명된 자는 우선적으로 훈도(訓導)로 삼고, 그 외 생원진사나 문과 회시초장 경경시험에 입격하여 천거를 받은 자와 유학(幼學)으로 예조와 각도 감사의 취재 시험을 통과한 자를 교도로 임명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1430년(세종 12) 유학의 교도 취재 대상 연령이 40세 이상으로 정해졌고, 1446년(세종 28)에는 문과 회시 초장 강경 입격자는 천거가 아니라 자원(自願)에 따라 취재없이 교도로 임명하는 규정도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의 교도(敎導)와 성종대 반포된 『경국대전』의 지방 교관인 훈도는 그 명칭의 차이는 있지만, 40세 이상을 응시 대상자로 하여 매년 정월에 한 번 취재하고, 문과 회시 초장 강경 입격자는 시험없이 임명한다는 『경국대전』 「이전」 취재조의 지방 훈도 취재 관련 규정은 세종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져 있었다고 하겠다.
1422년(세종 4) 11월 지방 교관 고찰 조건으로 교도의 처벌과 근무평정 관련 네 개의 규정이 정해진다. 이 규정들을 살펴보면, 먼저 각 고을의 수령은 4계절의 마지막 달마다 감사에게 학생의 이름 밑에 취학 연월, 독서 목록, 그리고 수업한 교관의 성명을 써서 보고하고 감사는 수령의 보고를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성과 실사의 참고 자료로 삼도록 했으며, 출근한 날과 휴가나 병가 등으로 결근한 날을 가려서 교도의 출근일수를 정확히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도의 자격과 수급 방법뿐만 아니라 지방 교관에 대한 주1 규정이 마련됨으로써 태종 재위 후반에 신설된 교도직제는 이제 하나의 관직제도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교도에 대한 관리 감독 규정의 강화되자 이에 상응하게 교도에 대한 처우개선책도 정비되었다. 1423년(세종 5)에는 권지로서 녹관 훈도로 임명된 자를 제외하고, 생원진사나 문과 회시초장 경경시험에 입격하여 천거를 받은 자와 유학으로 예조와 각도 감사의 취재 시험을 합격하여 교도로 임명받은 자는 자신의 주거지에 가까운 고을에 임관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세종대에 교도에 대한 보수 규정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월봉이 아니라 현직으로 인정되어 과전(科田)이 지급되었다.
이렇게 교도의 자격과 차임 방법, 권한과 대우, 근무평가와 진급 등의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었으며, 예종대 이후 훈도로 이름이 개칭되어 『경국대전』의 지방 향교 교관인 훈도제가 법제적으로 명문화되었다. 그러므로 15세기 교도제의 시행과 정비과정은 지방 향교 교관인 훈도제가 마련되는 과도기적 과정을 보여주며, 따라서 이는 당시 지방 교육의 변화를 보여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