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유생들에게는 여러가지 자치활동이 허용되었다. 유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국가의 원기(元氣)를 기르는 것이라고 본 역대 왕들은 정당한 사유이면 이들의 행동을 묵인하였다.
유생들은 자치활동을 위해서 기숙사인 동·서재(東西齋)에서 전체 대표 장의(掌議) 각 1인씩, 전방(前榜:재학생) 중에서 상색장(上色掌) 각 1인씩, 신방(新榜:신입생) 중에서 하색장(下色掌) 각 1인씩 모두 6인의 간부를 뽑아서, 이들에게 자치 영역에 관한 업무와 기숙사 운영의 일부 사무 등을 분장하였다.
전체 유생들의 모임이 필요할 때는 장의가 요청하여 재회(齋會)를 소집하였으며, 소집절차에서 집합형식까지의 모든 것은 관례에 따라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특히, ‘재인벌인(齋人罰人)’의 규칙에 따라 학생 처벌을 자치적으로 처리하기도 하였으며, 정상에 따라 상재생(上齋生)이 하재생(下齋生)을 벌줄 수도 있었다.
유생들이 국가에 대한 집단의사의 표시로서 유소(儒疏)를 올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① 상소할 안건이 있을 때는 식사시간에 식당에서 의견을 내어 양반수(兩班首:掌議)의 동의를 얻게 되면 정당(停當)이라고 하여 모두에게 알린다.
② 그리고 사문(斯文:유교 또는 유학자)에 일이 생기거나 역적에 대한 토벌이 있을 때는 진정서[疏]를 올리게 된다. 일단 결정이 되면 유생들은 반드시 따라야 하며, 추종하지 않는 자는 집단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벌칙이 가해지게 된다.
③ 진정서를 만들어 올리는 절차는 대의사(大議事)라고 하며, 위원장 격인 상소두(上疏頭)와 소색(疏色)·제소(製疏)·사소(寫疏)·별색장(別色掌) 등의 순서로 소임(疏任)을 선출하여 대의사기(大議事記)를 작성하고 어느 달에 올리는 것임을 밝힌 다음 순서에 따라서 전유생이 연서 날인한다. 이를 함에 넣고 붉은색 보자기로 싸서 명륜당으로 옮긴 뒤, 유생이 집합 정렬하면 독소(讀疏)가 나아가 낭독한다.
④ 소장(疏狀)이 대궐로 옮겨지기 전에 연도의 주민들에게 거리 청소를 시키며, 이때 거리의 상가는 철시를 한다. 유생들이 행렬을 지어 대궐문에 도착하면, 소함(疏函)을 놓고 줄을 지어 앉는다.
유생의 명부를 담은 네 개의 청금록(靑衿錄)도 함께 놓고 정원(政院)에 통보하여 소장을 왕에게 올리며, 왕의 회신인 비답(批答)을 받기 전에는 줄을 지어 앉은 채 해산하지 않는다. 비답이 늦거나 만족할 수 없으면 그곳에 간이식당을 마련하여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게끔 하며, 비답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재회를 다시 소집해서 두소(頭疏) 등 간부를 새로 뽑아 행한다.
⑤ 이러한 유소의 방법으로서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는, 식사 거부로 학교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일종의 집단휴학인 ‘권당(捲堂)’에 들어간다. 이러한 권당이 있으면 동지관사(同知館事)나 대사성(大司成)에게 보고하게 되고, 이들이 유생들을 집합시켜 권당하는 이유를 제출시켜 이를 위에 상신한다. 만약 만족할 만한 비하(批下)가 내려오면 식당에 들어가지만 그것이 만족할 수 없는 내용이면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⑥ 사태가 더욱 장기화되거나 악화되면 기숙사 퇴거인 ‘공재(空齋)’를 행하여 수업 중단에 이르게 되고, 이것이 계속되면 유생들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균관을 비우는 ‘공관(空館)’을 감행하게 된다.
이러한 공관은 세종 때부터 보이고 있다. 1448년(세종 30) 7월 왕은 호불(好佛)로 기울어져서 각계 유신·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궐 안에 내불당을 짓고자 하였다. 이때 성균관과 사학(四學)이 합세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공관을 하자 학관(學官)이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문묘에 예를 올린 다음, 파학(罷學) 이유로서 이단인 불교가 성하면 도덕이 쇠약하여진다는 것을 역설하고, 이러한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학교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유생들의 극렬성과 협박 및 성인을 함부로 핑계삼는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몇 명의 유생을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이 자신들의 불찰임을 아뢰고 성균사예(成均司藝) 나홍서(羅洪緖)에게 유생들의 등교를 당부하였다. 이 사건이 단시일에 수습되지 않자 영의정 황희(黃喜)에게 사태수습을 맡기게 되었고, 황희는 유생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설득함으로써 비로소 해결되었다.
중종과 명종 때도 왕이 불교부흥정책을 도모하자 공관이 있었다. 1551년(명종 6) 1월 유생들이 불교의 양종(兩宗)을 다시 세운다는 데 대하여 성토하고 공관에 들어갔다. 이 때 성균관 관계자도 이들을 설득할 수 없었고, 좌의정 심연원(沈連源)은 백관과 함께 유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줄 것을 여러 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겨우 다음달 7인이 재취학하였을 뿐 석전제(釋奠祭)마저 올리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1611년(광해군 3) 4월 정인홍(鄭仁弘)의 이언적(李彦迪) 문묘배향불가론에 반대하는 공관이 있었고, 1631년(인조 9) 10월 유생 처벌의 가혹성과 그 부당성을 이유로, 1650년(효종 1) 5월 영남 선비 유직(柳稷)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것을 들어 공관이 있었다. 그 뒤에도 현종·숙종 때까지는 공관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이후에는 권당의 기록만 보일 뿐 공관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96차에 걸친 공관 및 권당이 있었는데, 그 동기나 사유는 조선 전기와 후기가 상당히 달랐다. 선조 이전까지의, 조선 국왕 및 왕실의 호불에 대한 항의가 발단이 되었는데, 이것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보위하겠다는 입장에서 정당한 명분이 있는 것이었으므로 학생간의 대립이나 분열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당쟁으로 사론(士論)이 분열하면서 태학생들도 인맥과 지맥에 따라 분열되어, 공관과 권당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리고 학생간의 각축이나 당인(黨人)들의 논쟁에 개입해서, 때로는 당인들의 사주에 의한 소수학생의 선동에 의하여 행해졌기 때문에 매우 산발적인 것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공관이 억불정책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한 것이어서 정당하고 명분이 있는 것이었다면, 후기의 공관이나 권당은 당쟁에 편승한 것이어서 공의사회(公義社會) 구현에 기여하기보다는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