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조선을 이끌어 갈 핵심 문반 관원을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한 시험이다. 고려시대에 실시한 제술업을 이은 제도이다. 『 경국대전』에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상의 자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 초기 국가의 규정력과 양천제의 영향력이 강력하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원칙적으로는 법제적 지배 신분인 양인에게 문과 응시가 허용되었으며, 이 가운데 죄를 범하여 영원히 관직에 서용될 수 없다고 판정받은 사람, 뇌물을 받은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하거나 행실이 나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의 경우에만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경국대전』에서 규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국대전』에서는 정3품 당하관 이하의 관원에게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과 응시 당시 이미 정3품 당하관 이하의 관품과 관직을 가졌다는 것은 문음의 혜택을 받은 것을 말하며, 이들이 급제했을 때 참상관과 당상관에 제수하는 파격적 대우 규정을 마련한 것까지 고려해 보면, 여전히 시험에 귀족적 성격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문과 고시 과목을 식년시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서 모두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으로 나누고 있다. 초장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학(經學)에 대한 이해를, 중장에서는 문장 제술 능력과 관련하여 표(表), 전(箋), 부(賦), 송(頌), 명(銘), 잠(箴), 기(記) 등을, 종장에서는 사회 현안을 인식하는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대책(對策)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고시 과목들은 기본적으로 문반 관원의 직무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문반 관원에게 경서에 밝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이른바 ‘경명행수(經明行修)’를 강조하는 조선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기본적으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시를 실시하여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도록 규정하였다. 식년시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殿試)의 3단계를 거쳐 최종 33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아예 시험 시기도 고정하여 초시는 식년 한 해 전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각각 치르도록 하였다.
식년시의 초시에서는 세 종류의 시험으로 나누어 총 240명을 뽑았다. 초시에 해당하는 세 종류의 시험에는 성균관에서 주관하여 입격자 50명을 뽑는 관시(館試), 한성부에서 실시하여 입격자 40명을 선발하는 한성시, 8도에서 150명을 선발하는 향시(鄕試)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향시에서는 경상도 30명, 충청도 25명, 전라도 25명, 경기도 20명, 황해도 15명, 평안도 15명, 강원도 10명, 함경도 10명 등을 각각 입격시키도록 하였다. 복시에서는 초시 입격자 240명을 대상으로 33명을 선발하였으며, 전시에서는 국왕이 친히 참석하여 최종적으로 갑과, 을과, 병과로 나누어 급제의 순위를 결정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 급제자에게 주어지는 관품과 관직은 급제자의 전력(前歷)과 급제 당시의 성적에 따라 달랐다. 문과 급제자 가운데 일부는 급제 이후 당상관직과 참상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는데, 우선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의 전력이 생원, 진사, 유학(幼學) 등으로서 급제 당시의 성적이 장원(壯元)인 경우 종6품에 바로 제수되었다.
또한 문음의 혜택을 받아 당하관으로서의 마지막 품계인 계궁(階窮)의 전력을 가진 문과 급제자가 갑과의 성적을 받으면 당상관직에 즉시 제수되었으며, 참상관의 전력을 가지고 급제한 경우에는 성적에 상관없이 참상관직에 곧바로 임명되었다. 한편 문과 급제자의 대다수는 대체로 7품에서 9품까지의 관품을 받고,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의 종9품 관직에 별설된 권지(權知)에 나뉘어 임명되었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는 문치주의를 내세워 양반 관료제 내에서도 문반 우위의 관품 · 관직 체계를 마련하고, 문과 급제자만이 임명될 수 있는 당하관직을 별도로 규정하였다. 또한 문과 급제자들에게 파격적으로 초직을 제수하거나 핵심 참하관직에 분관시킴으로써 이후 빠르고 안정적으로 고위 관직과 청요직으로 승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경국대전』 규정 중에서 문과 고시 과목은 이후 시기에도 대체로 초장, 중장, 종장별로 고시 과목이 부여되는 큰 틀이 유지되었다. 한편 문과 응시 자격에서는 신분상의 변화가 나타나 서얼의 문과 응시가 허락되었다.
서얼은 『경국대전』에서 문과 응시가 금지된 이후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 관원이 되어 중인 신분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얼은 두 차례의 전란 이후 복구 사업과 북벌(北伐) 준비에 따른 군비 확충, 빈민 진휼 등을 위하여 마련한 국가의 재정 확보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숙종 대에 이르러 아무런 제한이나 조건 없이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내용이 『 속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문과 응시가 허용된 서얼들이 이후 다시 청요직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했지만, 『속대전』에서 서얼의 문과 응시가 법제화된 것은 정치 세력의 신분적 기반이 실제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 반포 이후 문과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문과 급제자 배출에서 별시(別試)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조선 초기에 별시는 본래 문반 참하관원의 수요를 식년시만으로 충당할 수 없을 때, 왕실의 경사를 경축하거나 권학(勸學) 또는 특정 지역의 위로가 필요할 때에만 실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국대전』에서는 식년시만을 문과 급제자 배출의 유일한 통로로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 반포 이후 16세기 전반기에는 별시가 자주 실시되면서 식년시보다 문과 급제자를 더 많이 배출하였으며, 16세기 후반부터는 별시가 식년시를 압도하였다.
16세기 전반기에는 사림 세력의 성장으로 정치 세력의 지역적 기반이 확대되면서 지방 유생들의 중앙 정계 진출 욕구가 강해지고, 국왕들은 이들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의도가 맞물리면서 별시의 실시 횟수와 급제자 수가 늘어났다.
사림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은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지방에 있는 사족들의 중앙 정계 진출 욕구가 더 늘어나면서 별시의 실시는 계속되었다. 여기에 정국 운영을 독주하던 특정 정치 세력이 별시를 통해 정치 세력의 규모를 확대하고, 청요직 제수 후보자들을 확보하려는 양상이 더해지면서 별시의 비중은 더 커졌다.
문과 급제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문과 급제자의 관직 진출과 관련된 규정도 변하였다. 문과 급제자에게는 본래 빠르고 안정적으로 고위 관직과 청요직으로 승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전반기에 별시가 자주 실시되면서 문과 급제자가 증가하였고, 삼관의 권지로 머물러 있는 기간이 늘어나 참상관직으로의 승진이 늦어졌다.
이에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사관예천(四館例薦) 이외에 사관별천(四館別薦), 삼관별천(三館別薦), 삼관가천(三館加薦) 등을 실시하여 권지에 적체되는 문제를 해소하였는데, 이 중 사관별천은 『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서 법제화되었다.
이후에도 별시의 실시로 문과 급제자가 더 늘어나 권지 적체가 심각해지자, 삼관 중에서도 문반 핵심 참하관직으로의 진출이 보장되었던 승문원의 참하관원을 중심으로 6품 관직의 승진 숫자를 늘리고, 문신중시(文臣中試)와 문신정시(文臣庭試)를 통해 6품 관직으로 승진하는 통로를 확대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러한 방안들은 모두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권지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은 16세기 전반기 이후 별시를 통해 문과 급제자의 수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별시가 문과 급제자 배출의 또 다른 통로로 기능하면서 『속대전』에서는 식년시 이외에 국가와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는 증광시(增廣試), 국왕이 성균관 행사에 친행할 때 실시되는 알성시(謁聖試), 관무재(觀武才)에 국왕이 몸소 나갔을 때 실시하는 춘당대시(春塘臺試), 각종 경사가 있거나 문신 대상의 중시(重試)가 실시될 때 함께 실시되는 정시(庭試) 및 별시 등이 모두 법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