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의 중재(中齋)와 하재(下齋), 사학(四學)의 학생(學生)과 지방 향교(鄕校)의 청금록에 입적한 교생(校生)이 사마시(司馬試)나 문과에 나갈 때에 유학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을 모두 유학이라 칭했을 뿐 아니라, 17세기에 이르러 “살아있을 때는 유학이라 칭하고, 죽은 뒤에는 학생이라 칭한다(生稱幼學 死稱學生)”는 관습이 나타나 유생이 살아있으면 과거(科擧) 응시나 나이와 상관없이 유학이라고 칭하였다.
유학을 직역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양반에서부터 양인 상층에 이르는 넓은 신분층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양반 상층의 사람들은 관직, 전함(前啣), 산계(散階) 등이 기재되었고, 그 자제들도 문음이나 대가(代加)를 통해 관직, 산계를 사용하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므로 유학은 양반 하층 이하나 양인 상층에서 주로 사용하였다고 보이지만, 양반 상층의 자제도 문음이나 대가를 받기 이전에는 유학이라 표기되었다. 이 때문에 유학 표기자의 신분이나 실태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번 관직이나 산계를 받고 나면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유학이라고 표기하지는 않았다.
유학은 유건(儒巾)이나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음으로써 구별되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일정한 예의범절과 법도를 지켜야 하였다. 가묘(家廟)를 세워 4대조의 신주(神主)를 모셔야 하고, 길흉상제(吉凶喪祭) 때에는 주자(朱子)의『가례(家禮)』에 규정되어 있는 법식을 따랐다. 서울은 성균관 및 사학, 지방은 향교의 유적(儒籍)에 등록되어야 하며,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실시하는 석전제(釋奠祭) 등에 참석할 수 있고, 학교에 입학하여 각종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사학과 향교에서 수년간 공부하다가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비로소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다시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대과(大科)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유생들의 정상적인 경로였다.
유학과 학교와의 관계를 보면, 인조 3년에 유생은 이름이 학교에 속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유학은 학교에 입적하였고, 이는 과거응시 자격요건의 전제가 되었다. 유생이 학교에 입적하지 않으면 과거응시를 규제할 정도로, 관직이 없는 유생을 학교로 유도하였다.
유학과 과거와의 관계를 보면, 조선시대 전시기를 걸쳐 유학은 과거시험 합격자의 전력에서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 만해도 각각 95% 이상을 차지한다.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에서도 마찬가지의 비율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유학은 생원·진사시에서의 합격률이 점차 증가해갔으며, 15세기 74.50%, 16세기 전반 90.94%, 후반에는 94.91%, 19세기 전반에는 99.39%까지 증가하였다. 생원과 진사의 충원은 거의 유학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유학의 변천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장적(帳籍)에 수록된 전체 호구(戶口)에서 유학 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공통적으로 격증하였다는 점이다. 양반들의 유학 재생산이 증가하고, 서얼(庶孼) 후손도 유학 호칭을 합법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비합법적인 모록(冒錄)도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유학을 가칭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 폐해를 구할 논의를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폐해가 컸다는 사례가 있듯이, 18세기 이후에는 유학에 대한 모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안동 향리의 자제들은 과거 응시에 유학이라 칭할 수 있게 되었고, 19세기에 이르면 기술직 중인(中人)도 유학을 직역으로 사용한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유학호(幼學戶)는 급증하였다.
이와 같이 18세기 이후로 오면서 유학이 수적으로 급격히 증가하였고, 대개 양반의 직역에 해당하던 유학이 18∼19세기에 이르러 중인이나 평민 계층에게도 사용되고 있어 유학의 신분개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886년 이후에는 학생은 보이지 않고 진사도 감소하는데 유학만은 급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유학의 신분이 하락되거나 그 지위가 낮아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18∼19세기 후반에 유학에게 관직이 수여되고 있는 등, 천망의 대상이 된 유학의 사회적 지위는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을 모칭하여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도 나중에 문제가 되었고, 관료나 사족(士族)들이 모칭유학(冒稱幼學)을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조선 후기에 중인이나 평민과 통혼한 것으로 기록된 유학은 유학 가운데 일부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거나, 모록(冒錄) 유학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학에 대한 모칭과 더불어 1708(숙종 34)년 이후에는 서얼 후손의 유학 호칭도 허용되어 유학 자체의 권위 및 지위 저하에 일정한 작용은 하였다.
유학은 19세기 전반까지 수적으로는 아주 드물더라도 참봉(參奉)에 주로 제수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 동몽교관(童蒙敎官), 검서관(檢書官), 가감역(假監役) 등이 보이고,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에 이르면 의금도사(義禁都事)에 많이 제수되고 있다. 개항기에 접어든 1888년부터는 유학으로 제수되는 관직이 다양해지는데, 그 가운데 참봉·가감역·의금도사가 주를 이룬다. 이와 같은 관직에 제수된 유학의 사회적 지위는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낙점된 사람을 보면 선조도 현관을 지낸 경우가 많았다. 모칭 유학자는 예외였겠지만 생원·진사시 합격자와 관직 제수자의 유학 직역은 양반 신분으로 부족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유학은 여전히 양반의 직역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유학을 칭하는 계층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유학은 유교를 신봉하고 유교 도덕을 실천하는 유교도(儒敎徒)이고, 독서인층이며, 식자층(識者層)으로서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확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거 응시 및 서용(敍用)을 위한 의망 등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법제적 처우를 받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유학의 존재는 유학자가 특별한 지위를 누리던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학은 관습적으로도 그러하였지만 법률상으로도 상민이나 천민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동일한 죄라 할지라도 유학은 상민이나 천민보다 가벼운 형벌에 처해지는 등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선비로서의 체통을 잃거나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유림(儒林)들로부터 빈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유벌(儒罰)을 받아 유적에서 제적당하였다. 이것은 일체의 특전이 박탈당함을 의미하며, 선비로서의 자격이 상실됨을 의미하였다.
유학은 본래 양반의 자손이나 사족의 신분을 표시하는 말로서, 학자층이 광범하게 형성되었던 조선 초기에 발생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공문서에 ‘양인모(良人某)·보인모(保人某)’등과 함께‘유학모(幼學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유학이라는 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일정한 신분과 직역의 의미도 함축하는 표현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신분과 직역이 일치하지 않게 되자 신분직역제(身分職役制)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신분직역의 개념을 갖는 유학보다는 유생이라는 용어가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