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가 자기의 심중을 나타내 임금에게 알리거나 제후가 천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릴 때 쓰는 글의 형식을 표라 한다. 중국 한나라 때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위해 군사를 동원할 때 촉한(蜀漢)의 황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가 유명한 표문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이 수(隋)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쓴 바 있고, 통일신라 때 성덕왕(聖德王)이 사신을 당에 보내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 소유로 인정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표를 올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에는 최치원(崔致遠)이 20편의 표를 지어 중국에 보냈으며,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 달라는 표문을 지어 북위(北魏)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에 표문은 대중국(對中國) 외교의 기본 요건으로 인식되어 관인들의 필수적인 실용문으로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두 종류의 표문이 존재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거나 관직 임명을 사양할 때 임금에게 표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중시되어 과거 중장(中場)의 시험 과목으로까지 채택되었다. 이러한 표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표문이 그 하나이고, 외교문서로서 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이 다른 하나이다.
또한, 인종 때 김부식은 인종의 장인인 동시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이 궁궐에서는 인종에게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해야 한다[上表稱臣]."고 주장한 것이 전자의 예이고, 국가 간의 외교 면에서 '상표칭신(上表稱臣)’한 것이 후자의 예인데 후자의 예가 여럿 보인다.
인종 때 금(金) 나라에 대하여, 고종 때에는 몽골에 대하여 ‘상표칭신’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외교문서로서의 표문은 외교상의 미묘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어, 박식하고 문장력이 뛰어난 문한관(文翰官)들이 주로 그 제술(製述)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림원(翰林院)이라는 관청에 속한 학사들이 표문의 작성을 주로 담당하였다. 표문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대체로 하표(賀表) · 사표(謝表) · 청표(請表) · 진봉표(進奉表) · 걸표(乞表) · 양표(讓表)로 나눌 수 있다.
하표는 왕의 즉위나 세자(世子)의 책봉 등 국가 또는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는 글이다. 사표는 관직의 제수(除授) · 승진 또는 물품의 하사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글이다. 청표는 임금에게 특정한 조처를 요청하는 글이다. 그리고 진봉표는 특정한 물품이나 책을 올리면서 잘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글이다. 걸표는 내직에서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거나 치사(致仕)를 요구하는 글이다. 양표는 특정 관직에의 제수를 사양하는 글이다.
한편, 이러한 표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쓰여진 한(漢) · 진(晉) 시대의 고체(古體)와 당(唐) · 송(宋) 이후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저술된 당체와 송체가 있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산문으로 된 것이 없지는 않으나 사륙변려문의 형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현재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나 『 동문선(東文選)』에는 삼국 이래 우리나라에서 지은 다수의 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