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 문신 황주량 등이 편찬하였다.
총 36권이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가 있어 태조 이래의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실록(實錄)이라 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경성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면서 보존된 서적과 기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1013년(현종 4) 9월 현종은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역사를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당시의 편찬 조직을 보면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叅知政事) 최항(崔沆)이 감수국사(監修國史),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金審言)이 수국사(修國史)가 되었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周佇)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 시어사(侍御史) 황주량, 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 등이 모두 수찬관(修撰官)이 되었다.
그러나 실록 재편찬 작업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1018년(현종 9) 거란의 침략과 편수관(編修官)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수국사 김심언은 1018년, 수찬관 윤징고가 1021년(현종 12), 감수국사 최항과 수찬관 주저가 1024년(현종 15년)에 각각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23년(현종 14) 12월 이공(李龔)이 새로이 감수국사에 임명되었으나 불미스런 사건으로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그 실질적인 편찬은 최충보다 과거 합격의 선배인 황주량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칠대사적』이 황주량에 의해 편찬된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고려사』에는 “황주량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사람을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의 『칠대사적』 총 36권의 책을 편찬하여 바쳤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여러 사정으로 미흡한 면이 있어 이를 실록이라 하지 못하고 『칠대사적』이라 하였다.
『칠대사적』은 급한 대로 1023년(현종 14)경 완성되었다. 그러다가 현종의 뒤를 이어 덕종이 즉위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1032년(덕종 1) 왕가도(王可道)를 감수국사로 하고, 황주량을 수국사로 삼았다.
그러나 왕가도는 다음 해에 귀향과 함께 역사 편찬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황주량에 의해 『칠대사적』의 보완에 착수하였으나 태조 대의 사실만 기록하는 데 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태조실록(太祖實錄)』이라 하게 되었다. 따라서 혜종부터 목종까지의 실록은 존재치 않게 되었다.
『고려사』에 정당문학(政堂文學) 황주량이 편찬했다고 나오는 『태조실록』은 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즉, 『태조실록』은 덕종 원년부터 시작하여 덕종 3년 7월까지 편찬한 것으로 현종 대에 편찬한 『칠대사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고려사』 편찬 시에도 반영되어 태조 세가(世家)는 분량이 많은데 비해, 태조를 제외한 혜종~목종의 세가는 분량이 극히 적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칠대사적』이 곧 『칠대실록』이며, 『태조실록』은 그 일부라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로 『동문선(東文選)』 권6 칠언고시조(七言古詩條)에 홍간(洪侃)은 충렬왕 2∼3년경 해인사(海印寺)로 책을 포쇄(曝曬)하러 가는 추적(秋適)을 전송하며 지은 「송추옥섬쇄사해인사(送秋玉蟾曬史海印寺)」 시구에 ‘삼한 23대의 실록’이라는 말이 보이며, 정총(鄭摠)의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에도 “고려는 시조 이래 역대 모두 실록이 있었다.”라고 했으므로 당시 『칠대사적』은 실록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려사』에 『태조실록』만 언급되어 있고 『혜종실록(惠宗實錄)』에서 『목종실록(穆宗實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칠대사적』은 없어졌던 고려 초기의 역사적 사실을 간략하게나마 복원하여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게 해주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고려의 건국자였던 태조 왕건(王建)의 업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실로 큰 다행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