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지경(之慶)이다.
1266년(원종 7)에 민지(閔漬)가 장원하였던 과방(科榜)에 함께 등제하였다. 벼슬이 비서윤(祕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하였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균(許筠)도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되는데, 허균은 “「난부인(嬾婦引)」·「고안행(孤雁行)」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고 하였으며,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저서에 12대손 홍방(洪霶)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