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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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오언이나 칠언의 율시를 10구 이상 늘어놓은 한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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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오언이나 칠언의 율시를 10구 이상 늘어놓은 한시체.
내용

율시의 정격에 구수를 더하여 지으므로 ‘장률’이라고도 부른다. 육조의 안연지(安延之) 등에게서 시작되었다. 당나라에 와서 이 체가 흥하였고 비로소 배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김득신(金得臣)은 초당(初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남용익(南龍翼)도 초당의 4걸에게서 시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배율은 8구인 율시와 같은 평측과 대우법 등을 갖추어 10구 이상의 장편으로 구수에 제한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다. 적은 것은 10구에서부터 시작하여 200구 이상의 것도 있다. 오언이나 칠언으로 모두 지을 수 있다. 오언으로 짓는 것이 통례이고 칠언으로 쓰인 배율은 그리 흔하지 않다. 첫연과 끝연을 제외하고는 아래 위 구절 모두 대우가 필요하다.

당대의 과거 진사과에서는 시부의 과목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12구의 오언배율로 작품을 짓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특히 시율(試律) 또는 시첩시(試帖詩)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율시의 정격을 엄격히 지킨 전형적인 당대의 배율들이다. 1 · 2구를 기련(起聯), 3 · 4구를 함련(含聯), 5 · 6구를 경련(頸聯), 7 · 8구를 복련(復聯), 9 · 10구를 후련(後聯), 끝의 두 구를 미련(尾聯)이라고도 한다.

배율에 능하였던 사람으로는 고려이규보(李奎報), 조선임숙영(任叔英)이 일컬어진다. 엄격한 형식과 호방한 시상 등이 필수 요건인 이 시체는 창작된 예가 드물고, 자신의 문재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두보는 200구에 이르는 장편의 배율을 지었으나, 그 구절이 너무 많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규보는 무리없이 600구를 지어 문재를 과시하였다.

조선의 임숙영은 이안눌(李安訥)에게 보내는 시에서 1, 432구에 달하는 장편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고금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시에 사용된 운자가 운서에 없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 출처에 대해 스스로 주를 달려고 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득신은 『종남총지(終南叢志)』에서 이 시에 대해 “그 시는 시상이 넓고도 기이하니, 진실로 천년에 한 번 나올 걸작이다. ”라고 하였다. 임숙영은 또 「관창(觀漲)」이라는 시에서는 강운(强韻)을 사용하여 7언으로 200구를 지었다고도 한다.

짧은 형식에 작자의 의도를 압축적으로 담아야 하는 절구 · 율시 등은 언어의 조탁이나 기발한 시상을 필요로 하다. 그러나 배율은 구절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시구를 단련하는 것만을 바르게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단어를 배치하는 것과 뜻이 처음과 끝이 관통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하였다. 자칫 말의 산만한 배열에 빠지기 쉬운 장편시의 취약점 때문에 작자의 의지가 일관되게 나타나게 하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참고문헌

『호곡시화(壺谷詩話)』
『종남총지(終南叢志)』
『임하필기(林下筆記)』
『문체명변(文體明辨)』(서사증)
『중국문학개론』(김학주, 신아사, 1977)
『中國文學槪論』(鹽谷溫 著, 孫良工譯, 臺北 開明書店,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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