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시가 음악과 완전히 분리된 뒤에 노래 가사로 생겨난 한문 문체이다. 곡자, 악부, 신성, 여음, 별조, 장단구, 시여, 전사라고도 한다. 사는 본래 노래가사였다. 그래서 제목은 언제나 악곡명을 쓴다. 악곡명을 따른 사의 제목을 보통 사패, 사조 또는 패(牌)라 부른다. 사도 다른 운문과 마찬가지로 압운을 하지만, 통운이나 전운이 자유롭다. 첫구의 압운한 곳을 기조, 전후단의 끝 운자리를 필곡이라 한다. 세 군데 압운의 평측은 모두 같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의 구법은 장단이 고르지 않지만, 3·4·5·6·7자의 구가 흔히 쓰인다.
한대 악부와 같은 노래가사였다는 점에서 악부(樂府)라고도 불렀고, 새로운 악곡가사라는 뜻에서 신성(新聲) · 여음(餘音) · 별조(別調) 등으로도 불렀다. 그리고 구형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장단구(長短句)라고도 불리었고, 시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시여(詩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평측에 의하여 장정(章程)이 형성된다 하여 의성(倚聲)이라 부르기도 하고, 사(詞) · 운(韻) · 자수(字數)의 정법에 문자만 전충(塡充)한다는 뜻에서 전사(塡詞)라고도 불렀다.
사의 발생을 멀리 육조시대의 악부로 소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당대에 이르러 가사로서의 시가 5 · 7언 정형으로 변하고 다시 시율이 엄격한 근체시로 발전하여 읽는 시로 완전히 변형되었다. 시인들은 가요곡을 빌려 새롭고 자유로운 형식의 사의 창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사의 형태에는 단조체(單調體)와 쌍조체(雙調體)가 있다. 당대에는 쌍조가 많고 5대 이후부터는 단조가 많다. 또 당나라의 사는 제언체(齊言體)이거나 제언체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그리고 후대로 가면서 장단의 변화가 많이 생기고 있다.
사는 본래 노래가사였다. 그래서 제목은 언제나 악곡명을 쓴다. 악곡명을 따른 사의 제목을 보통 사패(詞牌) · 사조(詞調) 또는 패(牌)라 부른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편찬한 『흠정사보(欽定詞譜)』에는 826종의 조패(調牌)에 2,318종의 사체가 수록되어 있다. 약간의 산곡도 섞여 있어 사패의 뜻과 사의 내용이 같은 것도 있지만 전연 무관한 것도 있다. 그래서 사패 아래 또 하나의 사제가 붙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는 다른 운문과 마찬가지로 압운을 한다. 그러나 사는 당시 시부에 통용되던 운법과 같지 않아 통운(通韻)이나 전운(轉韻)이 자유롭다. 그리고 『흠정사보』를 보면 자마다 평측이 표시되어 있다. 곧, 사도 근체시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평측의 법칙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변화가 많아서 일률적인 평측의 원칙을 따지기는 어렵다.
사의 구법은 장단이 고르지 않다. 한 구가 1자인 것에서부터 9자인 것까지 있다. 3 · 4 · 5 · 6 · 7자의 구가 사에 가장 흔히 쓰이는 구절이다. 자수에 상관 없이 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첫째 구와 전후단의 끝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구의 압운한 곳을 기조(起調), 전후단의 끝 운자리를 필곡(畢曲)이라 부른다. 이 세 군데 압운자의 평측은 원칙적으로 모두 같아야 한다.
고려 선종 6년 9월에 선종이 요나라 사신에게 향연을 베풀면서 「하성조사(賀聖朝詞)」를 짓는 데서 최초로 사작이 시도된다. 그밖에도 선종이 여러 편의 사를 지은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작품은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사작품을 처음 남긴 이는 이규보(李奎報)이다. 그의 문집 가운데 고율시의 편장 또는 6조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를 따로 모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이다.
사작에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과를 거둔 이는 이제현(李齊賢)이다. 그의 문집에 장단구 15조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 사람으로 그 까다로운 구법 · 성조 · 운법 등의 규제를 극복하고 이러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개성이 뚜렷하고 사조도 다양하게 사작을 시도한 이는 김시습(金時習)이다. 이후에는 많지는 않지만 면면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