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정당문학, 예문춘추관태학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만석(曼碩)
복재(復齋)
시호
문민(文愍)
이칭
서원군(西原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58년(공민왕 7)
사망 연도
1397년(태조 6)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예문춘추관태학사
관련 사건
표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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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정당문학, 예문춘추관태학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추(鄭樞: 일명 公權)이며, 조선개국공신 정탁(鄭擢)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 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옷을 입지않은데 대한 국문을 두려워하여 도망하다 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백곡집(栢谷集)』
『동문선(東文選)』
『해동잡록(海東雜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고려국사(高麗國史)의 편찬내용(編纂內容)과 사론(史論)」 (변태섭, 『단국대학교학술논총(檀國大學校學術論叢)』 3, 1979)
『조선전기 사학사연구』(한영우,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명초(明初) 문자옥(文字獄)과 조선표전문제(朝鮮表箋問題)」(박원고, 『사학연구(史學硏究)』25, 1975)
집필자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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