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사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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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략
동국사략
조선시대사
문헌
국가유산
조선전기 문신 · 학자 권근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기록한 역사서.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동국사략(東國史略)
분류
기록유산/전적류/필사본/고본
지정기관
대전광역시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1989년 03월 18일 지정)
소재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안대로 398 (상대동, 대전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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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동국사략』은 조선전기 문신·학자 권근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1402년 6월에 왕명으로 착수되어 이듬해 8월에 완성되었다. 하륜·권근·이첨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권근이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편년체 사서로서 주자의 강목법에 따라 사건을 서술했으며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하게 표방한 특징이 있다.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하는 고대사의 체계를 수립했으나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준엄한 역사 비평을 가하고, 명분에 맞지 않는 명호를 과감하게 바꿔 기술했다. 우리 고유의 전통신앙은 이단문화로 비판하고 신화·전설은 삭제하여 싣지 않았다.

목차
정의
조선전기 문신 · 학자 권근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기록한 역사서.
내용

일명 ‘삼국사략(三國史略)’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동국사략’이라 불리는 저서는 여러 종류가 있다. 16세기에 이우(李嵎) · 박상(朴祥) · 유희령(柳希齡) · 민제인(閔齊仁) 등이 각각 『동국사략』을 지었으며, 1906년에 현채(玄采)가 지은 『동국사략』도 있다. 여기서는 최초의 『동국사략』을 말하는데, 1402년 6월에 왕명으로 착수되어 이듬 해 8월에 완성되었다. 하륜(河崙) · 권근 · 이첨(李詹)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권근이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서문과 전문(箋文)을 모두 그가 썼으며, 50여편의 사론(史論)도 대부분 그가 썼다.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 이부(二府) · 삼한 · 삼국의 순으로 서술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단군 · 기자 · 위만의 3조선을 설정한 것은 이미 『삼국유사』『제왕운기』에서 보인 바로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한에 대한 서술은 『삼국유사』에 따라 마한을 기자의 후예로, 진한을 진(秦)의 유망인으로, 변한을 출자불명(出自不明)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삼한 70여국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본 『제왕운기』의 삼한 서술과도 크게 다르다.

한편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최치원과 『후한서』의 설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당서(唐書)』를 좇아 마한을 백제 지방, 변한을 고구려 지방, 진한을 신라 지방에 비정하는 새로운 설을 내세웠다. 이 설은 그 뒤 『동국통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서들에 통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삼한 다음에 2부를 설정한 것도 『삼국유사』를 좇은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낙랑 · 부여 · 대방 · 흑수 · 옥저 · 가야 · 발해 등 국가는 『동국사략』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잃고 말았다. 이것은 상고사 체계가 그만큼 단순화되고 일원화된 것을 뜻한다.

삼국시대에 관한 서술은 신라를 위주로 하여, 신라의 연기(年紀) 밑에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신라를 삼국의 주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권근은 신라가 ‘선기후멸(先起後滅: 가장 먼저 건국하고 가장 늦게 멸망함.)’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뒤에 많은 비판을 받아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편년체 사서로서 주자의 강목법(綱目法)에 따라 사건의 큰 줄거리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 그 세목을 작은 글씨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이 책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목법을 따른 효시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색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준엄한 역사 비평을 가하고, 명분에 맞지 않는 명호(名號)를 과감하게 바꾼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삼국의 연기를 사실에 맞게 즉위년 칭원법(卽位年稱元法: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햇수를 계산하는 법)을 따르지 않고,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햇수를 계산하는 법)을 쓴 것이 그 한 가지이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과 같은 신라의 고유한 왕호가 비야(鄙野)하다는 이유로 모두 왕으로 고쳐 썼다. 또한, 여왕 · 태후 · 태자 등의 칭호도 제후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여주 · 대비 · 세자로 고쳐 썼다. 고대의 제천행사 · 불교행사 · 도교행사, 기타 관혼상제에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를 이단문화, 또는 강상(綱常)의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 또는 제후의 명분에 어긋나는 행위로서 일일이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리고 신이한 내용을 담은 신화나 전설은 황탄불경(荒誕不經: 근거가 없고 허황되며 상도에 어긋남)한 것으로 여겨서 대부분 삭제하고 싣지 아니하였다. 권근은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대해 “대의(大義)가 인경(麟經)에 어그러지고, 필삭(筆削)과 범례가 마땅함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강상윤리를 철저히 옹호하지 않고, 이단을 극렬히 배척하지 않았으며, 신화와 전설을 많이 삭제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다.

결국 이 책은 엄격한 성리학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고대문화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보다도 명분론적인 입장에서 고대문화를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국사략』에 나타난 찬자의 역사의식은 태종대의 정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요동정벌운동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서얼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 적실 왕자들을 소외시킨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고 집권한 태종과 그를 보좌한 권근 · 하륜 등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하게 표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역사 서술에 투영시켜 한국사 체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 바로 『동국사략』의 편찬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조선전기사학사연구』(한영우,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조선전기의 역사의식」(남지대,『한국사상사대계』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동국사략에 대한 사학사적고찰」(정구복,『역사학보』 68, 1975)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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