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세상을 떠나자 유리(儒理)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평소 덕망을 지니고 있어서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고자 하였다. 탈해는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유리의 치리(齒理: 잇금)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자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왕으로 받들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불렀다. 김대문(金大問)은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으로서 치리(齒理: 잇금)를 일컫는 말이다. 이빨이 많은 것으로써 서로 왕위를 이어갔으므로, 이사금이라고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화는 이상과 같으나, 이사금의 어원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근래에 와서 이사금이란 ‘니슨금’ · ‘닛금’ · ‘니은금’이 임금으로 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부족사회에서 족장을 추대하는 데 이로써 현우(賢愚)를 가리던 풍습이 뒤에 계승자를 의미하는 왕을 뜻하는 말로 발전하였다고 본다.
왕호가 차차웅(次次雄)으로부터 이사금으로 변한 것은, 유리왕 때 초보적이나마 관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로국(斯盧國)의 성장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이사금 칭호가 사용된 하한선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제18대 실성왕대까지 16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삼국유사』에는 제16대 흘해왕까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17대 내물마립간부터 신라의 국가적 활동이 활발해지는 사실은 왕권의 강화에 의하여 뒷받침된 것이므로, 흘해왕까지를 이사금으로 칭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