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할아버지는 보문각제학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증 참찬의정부사(贈參贊議政府事) 이희상(李熙祥)이다.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의 제2인으로 합격했고, 1368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이 되고, 이듬해 우정언에 이어 1371년 지통사(知通事)로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그 뒤 1375년(우왕 1) 우헌납에 올라 권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10년간 유배되었다.
1388년 유배에서 풀려나 내부부령(內府副令)·예문응교를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며, 1391년(공양왕 3)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사를 맡았으나, 이 해에 장류(杖流)된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연루되어 결성(結城: 충청남도 홍성)에 다시 유배되었다.
조선조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등용되어 동지중추원학사(同知中樞院學士)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로 전위사(傳位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태종 2)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륜(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의 부사(副使)로서 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명에 다녀왔다.
그 때 고명(誥命: 명에서 조선의 왕을 인정하는 승인서)과 인장(印章: 옥새)을 고쳐 주도록 주청(奏請)하였다. 뒤에 그 공로로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고 정헌대부에 올랐다. 그 해 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을 겸했으며, 1403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하륜 등과 함께『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했고, 소설『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며, 유저로는『쌍매당협장문집(雙梅堂篋藏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