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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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지명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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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
내용

이른바 삼한의 하나이다. 위치를 한강 하류 유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조선 중기 이래로는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방면이라는 견해가 통설화되어 있다.

진한의 맹주는 경주사로국(斯盧國)이며, 12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되었다. 진한과 변한의 각 소국은 마한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것이 많아, 큰 것이 4,000∼5,000가(家),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가 되었다.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는 진한 형성의 주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내용이 실려 있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즉, 《삼국지》에는 진한만이 옛 진국(辰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 모두가 옛 진국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진국을 남한 전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후한서》의 기록을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삼국지》의 기록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시도하는 입장에서는 진국을 마한지역에 있던 특정 소국으로 규정하고 한강 유역에 있던 진국 또는 전라 북도 익산 부근에 있던 진국이 경상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진국 자체의 성격에 아직 많은 의문점이 있기는 하지만, 진국을 서기전 3∼2세기 경 중남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 간주한다면, 진국의 존재는 이 단계의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마한지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볼 때, 진국의 존재를 경상도 방면에서 찾고 이를 진한과 관련시킬 근거는 아직 희박한 듯하다.

진한 형성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이른바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지(韓地)에 이주한 중국 전국계(戰國系) 유민이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받아 진한을 형성하였고, 초기에는 6국이었으나 점차 12국으로 나누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불합리한 전승으로, 고조선 유민 또는 온조(溫祚) 집단의 남주 정착 과정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한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방에서는 전체적으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청동기·철기문화의 유입,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현저하게 증가된다.

다량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의 출현은 정치집단의 대두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대구 지역에서는 위씨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같은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본다면 혁거세(赫居世) 집단의 대두와 6촌(六村) 통합에 관한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씨조선계 주민과 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청동기문화 단계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다수 통합되면서 《삼국지》의 진한사로국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리고 청동기· 철기 교역을 통하여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일정한 세력권을 상정하고, 이를 진한 소국 연맹체 형성의 실마리로 간주한다면, 진(秦)의 망명인들이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록도, 넓은 의미에서 위씨조선계 유민의 경상도 방면 이주와 이에 따른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국 연맹체로서 진한의 실체가 확립되는 것은 이 단계부터 내재하던 경주·대구 중심의 세력 토대가 12국으로 확대 발전되고 사로국 중심의 정치적·경제적인 종연맹조직이 성립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략 魏略》의 기사에 나오는 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20∼30)에 낙랑군에 조공하였다는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는, 12개 소국 연맹체로서의 진한이 아니라 경주·대구 세력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유력한 소국의 신지(臣智)로 간주된다.

《진서 晉書》에 의하면 진한 소국 연맹체는 서기 280년, 281년, 286년 세 차례에 걸쳐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진(晉)에 견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원거리 교역의 실시는 진한 소국 연맹체의 결속력과 조직력이 3세기 말경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한의 이름으로 대외통교를 전개하고 있던 진한 소국의 대부분은 신라 국가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창녕의 소국(불사국 또는 난미리미동국에 비정됨)과 같이 3, 4세기 이후 진한 연맹체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가야 소국으로 발전한 것도 있는 듯하다. →삼한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신라국가형성사연구』(이종욱, 일조각, 1982)
「전후삼한고」(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조선도서주식회사, 1929)
「진한위치고」(임창순, 『사학연구』 6, 1959)
「삼한문제의 연구」(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삼한의 성립」(천관우, 『사학연구』 26, 1976;『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90)
「삼한의 국가형성 상」(천관우, 『한국학보』 3, 1976)
「진·변한 제국의 위치시론」(천관우, 『백산학보』 20, 1976)
「준왕 및 진국과 삼한정통론의 제문제」(김정배, 『한국사연구』 13, 1976)
「新羅建國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집필자
이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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