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책은 원래 두꺼운 종이에 먹칠을 하고 기름을 먹여 아이들이 글쓰기 연습을 하는 책을 말한다. 정사(政事)는 인사행정을 말한다. 원래 고려시대의 인사행정은 문신은 이부(吏部)에서, 무신은 병부(兵部)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나 무인집권기에 들어와 최우(崔瑀)가 자신의 사저에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인사를 전담케 하면서 인사행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뇌물이 횡행하고 자격 없는 자들이 관직에 임용되었다.
이러한 정방을 통한 인사의 난맥상은 충숙왕(忠肅王) 대에 극에 달하였다. 충숙왕의 폐신(嬖臣)이었던 김지경(金之鏡)이나 이인길(李仁吉) 등이 그 장본인이었다. 김지경이 여러 번 관직을 승진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을 때였다.
왕이 배주(白州)에 행차했을 때 원의 사신 울제이[完者]가 왔는데, 김지경이 왕에게 울제이의 족당(族黨) 중 고려에 있는 자들에게 관직을 주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김지경 및 고용현(高用賢) · 봉천우(奉天祐)에게 명령하여 인사를 담당케 하였다. 그러자 신시용(申時用)이란 자가 정방에 와서 김지경에게 욕을 하며 자기 자식들에게도 관직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돈만 있으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라 떠들었다.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으므로 김지경 등은 밤에 촌사(村舍)에 숨어서 인사행정을 단행하였다. 상호군(上護軍) 신정(申丁)이 관직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김지경과 봉천우에게 욕하며 말하기를, “돈이 없는 자는 관직을 구하지 말란 말인가?”라고 하니, 김지경 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비목(批目)이 작성되자 이인길이 자기 집에서 제멋대로 고쳤고, 비목이 내려오자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자들이 다투어 붉은 먹으로 고쳤으므로 판별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동요(童謠)에서, “종포(綜布)를 사용하여 도목(都目)[인사행정]을 만들었으니 정사(政事)가 참으로 흑책이 되었도다. 나도 여기에 기름칠을 하고 싶지만 올해는 삼[麻]의 씨가 적으니, 아! 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인사대상자 목록인 비목이 내려오면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 자[用事者]들이 다투어 서로 이름을 칠하고 지우며 고쳐 정하여서 붉은색과 검은색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비방하여 흑책정사(黑冊政事)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흑책정사의 결과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이 극성을 부렸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사담당자가 임금도 모르게 자신을 승진시키는 경박한 풍조까지 만연하였다. 그러자 이제현(李齊賢)은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인사행정을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다.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행정을 전리사(典理司[이부의 후신]와 군부사(軍簿司[병부의 후신]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관리들의 공로와 과실, 그 재능 여부를 논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 도목을 받아서 정안(政案)을 고과하고 출척(黜陟)에 활용하여 항구적인 법규[恒規]로 삼는다면, 청탁하는 무리들을 근절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개혁을 수행하지 못하면 다시 인사 서류가 흑책이라는 비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법적인 인사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은 치폐를 거듭하면서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