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집권자.
이칭
시호
광렬(匡烈)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49년(고종 36)
본관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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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정의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집권자.
개설

본관은 우봉(牛峰). 뒤에 최이(崔怡)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최충헌(崔忠獻)이며, 어머니는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金銀), 진완(珍玩) 등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 등용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 또는 파면하고, 아우 최향(崔珦)을 귀양보내는 등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122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집권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몽골(蒙古)의 침입에 대비하여 의주(宜州: 지금의 함경남도 德源) · 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 · 철관(鐵關: 지금의 鐵嶺) 등 요충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1223년에는 은병(銀甁) 300여 개, 쌀 2,000여 석을 내고, 가병(家兵)을 동원,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리하였으며,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흥왕사(興王寺)에 안치하였다.

1225년에는 사제(私第)에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문무백관의 인사문제를 처리하였다. 이 정방에서 백관의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헤아려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올리면 왕은 그것을 결재하여 내릴 뿐이었다. 1227년에 사제에 서방(書房)을 두고 문객 가운데 명유(名儒)를 소속시켜 3번(番)으로 나누어 숙직하게 하였다.

이것은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숙위기관(宿衛機關)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도방은 아버지 때의 것을 계승, 강화하여 내 · 외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하였다. 이 때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최우의 저택을 호위하고 외도방은 최우의 친척과 외부의 호위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228년에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에는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해 격구장(擊球場)을 만들고 매일 도방과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를 하게 하였다.

그 자신도 격구장에 나가 5, 6일에 걸쳐 구경하는 한편, 재추(宰樞)와 기로(耆老)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마별초는 최우가 만든 기병대로서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하던 사병집단이다.

또,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다.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三別抄)로 확대, 개편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았다.

1231년에 처 정씨(鄭氏)가 죽자 왕은 채단(綵緞) 70필을 내려 왕후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으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증직하고 시호를 경혜(敬惠)라 하였다.

1232년에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고 나서 녹봉거(祿俸車) 100대로 가재(家財)를 강화로 옮기고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피란하게 하였다.

또한, 제도(諸道)의 백성을 산성과 해도(海島)로 피란시키고,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에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다. 이때 최우는 사제를 지었는데, 원중(園中)에 송백(松栢)을 심어 그 원림(園林)이 수십리에 달하였다. 1242년에 작(爵)이 올라 진양공(晉陽公)이 되었다.

1243년에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00곡(斛)을 바치는 등 장학에 힘썼다. 또,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강화에서 대장경 재조(再雕)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는 최우가 죽고 2년 뒤인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

이 때부터 차츰 횡포와 사치가 심해져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1247년에 서자(庶子) 최만전(崔萬全)을 환속시켜 이름을 최항(崔沆)이라 고치고 예를 배우게 하는 한편,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 호부상서를 삼고 가병(家兵) 500명을 나누어 주었다.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에 모두 능하였다.

상훈과 추모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서 공신당(功臣堂)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강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나,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 재추의 건의로 도형이 제거되고 묘정에서 배향이 폐지되었다. 시호는 광렬(匡烈)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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