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경진(慶珍)의 아들이다.
일찍이 큰뜻을 품고 가산을 돌보지 않았으며, 아버지 경진(慶珍)이 불법으로 탈취한 토지의 전안(田案)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취하지 않아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5세에 음서(蔭敍)로 교위(校尉)에 임명된 뒤 차차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되었다.
1178년(명종 8)에 개경에서 살다가 낙향한 청주 출신 사람들과 원래 청주인(원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겨 100여 명이 죽게 되자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사심관(事審官)으로 파견되었으나,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179년 평소 불만이 많던 집권 무신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자 결심하고, 견룡(牽龍) 허승(許升) 등과 모의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과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무신이 된 뒤에는 종전의 최고권력기구 기능을 하던 중방(重房)의 존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적 집단인 도방(都房)을 두어 정권유지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으나 관리등용에는 문무신을 고루 기용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 여러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여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경대승을 도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이 컸던 허승과 김광립(金光立)을 제거하였으며, 1181년에는 대정(隊正)을 지낸 한신충(韓信忠) · 채인정(蔡仁靖) · 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섬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경대승은 유언비어라 할지라도 잡아가두고 국문(鞠問)하는 등 형벌이 무자비했다. 집권 동안 도방의 무리라 일컫는 도둑이 횡행하고, 잦은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어지러웠으며, 1183년 집권 5년여 만에 30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