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별초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220년대(최우집권기 추정)
공포 시기
1220년대(최우집권기 추정)
시행 시기
고려 후기
폐지 시기
1273년(삼별초 대몽항전) 이후
주관 부서
미상
내용 요약

야별초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집권 무신 세력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무력적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은 야별초가 관군(官軍)이면서도 사병(私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확대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재편되었다가,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대몽 전쟁의 핵심 부대였고, 권력 변동에 중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
제정 목적

야별초(夜別抄)의 설치 시기는 최씨 정권의 2대 주1이었던 최우(崔瑀: 개명 崔怡)가 집권했던 1219년(고종 6)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시점은 대략 1220년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순검군(巡檢軍)으로서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 후 향촌 사회에서도 도적이 성행하여 중앙의 야별초를 지방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치안 유지의 공백 상태를 야별초가 대신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도적이란 비단 남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만이 아니라, 최씨 정권의 정적(政敵) 혹은 향촌 사회의 저항 세력들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야별초는 관군(官軍)과 같은 성격을 지니며 최씨 정권의 권력 강화의 목적에서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저항 세력이 늘어나고 초적(草賊)의 숫자가 늘자 이를 제어하기 위해 야별초 병력을 늘려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로 분리했다는 것은 최씨 정권의 군비 강화와 새로운 군사 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한 대몽 전쟁기(1231∼1259)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자들로 조직된 신의군(神義軍)이 야별초에 더해져 삼별초(三別抄)를 이루었다.

내용

야별초는 좌별초 · 우별초로 구성되어 각기 3번(番)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등 자료에서 보면, 야별초 도령(夜別抄都領) ·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등의 사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지휘 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령(都領)지유(指諭)무반(武班)의 품관직(品官職)은 아니었고 특수한 조직에 설치되던 직책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소규모 전투에서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이후 대몽(對蒙) 전쟁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에서 볼 때 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과 충성심이 높은 사람들이 임명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좌 · 우별초가 3번으로 나뉘어 있고 각 번의 지휘 계통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야별초 병력 수효가 많고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했음을 방증해 준다.

최씨 정권이 도방(都房) · 마별초(馬別抄) · 주3 등 방대한 사병 조직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삼별초를 따로 조직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병은 최씨 정권을 지탱하는 데는 유익했지만 그 이외의 공적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고려의 정규군인 2군(軍)6위(衛)가 유명무실해져 국가적 차원에서도 비상 시기를 대처할 수 있는 전투 편제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비상 조직을 염두에 두고 창설한 부대가 야별초였고, 이후 확대된 것이 삼별초이다. 그러나 야별초가 중심이 된 삼별초는 1270년(원종 11) 본격적인 삼별초 항쟁 이전에는 대몽 전투나 국방보다 중앙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향촌 사회를 지배하는 데 더 많이 동원되었다.

의의 및 평가

야별초는 무신정권의 권력 유지와 대몽 전쟁기 주4 정부의 본토 장악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무력 기반이었다. 더구나 야별초가 중심이 된 삼별초는 “권신(權臣)이 집권하면서 이로써 조아(爪牙)를 삼아 녹봉을 후하게 하고 혹은 개인적 은혜를 베풀고, 또 죄인(罪人)의 재산을 빼앗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권신들이 마음대로 부렸고, 그들은 앞다투어 힘을 다했다. 김준(金俊)이 최의(崔竩)를, 임연(林衍)이 김준을, 송송례(宋松禮)가 임유무(林惟茂)를 죽임에 있어 모두 그 힘을 빌렸다.”라고 했듯이, 최씨 정권의 붕괴와 이후의 정권 교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력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삼별초를 이루었던 중심이 야별초였으며, 국가 군대로서의 성격과 함께 정치 세력의 사병으로서의 성격도 강하게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새문사, 1987)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경인문화사, 2002)
홍승기 편, 『고려무인정권연구』(서강대학교 출판부, 1995)

논문

강재광, 「고려무인정권 말기 무신 송송례의 정변 참여와 무인정권 붕괴」(『한국중세사연구』68, 한국중세사학회, 2022)
김낙진, 「고려중기의 군직 ‘지유’와 ‘행수’」(『군사』10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동방문화교류사논고』, 을유문화사, 1948)
김수미, 「고려무인정권기의 야별초」(『고려무인정권연구』,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5)
김윤곤, 「삼별초의 대몽항전과 지방 군현민」(『동양문화』20·21, 영남대학교 부설 동양문화연구소, 1981)
신안식, 「고려중기의 별초군」(『건대사학』7, 건국대학교 사학회, 1989)
주석
주1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3

권세를 가진 개인이 사사로이 길러서 부리는 병사. 우리말샘

주4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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