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는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이다. 무신집권기 최씨 정권의 사병으로 존재하던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말한다. 최우 집권기에 치안을 목적으로 경찰 업무를 하는 야별초를 조직했고 그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대몽항쟁에서 군사적 활약상이 두드러졌으나 대몽강화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 정부를 세우고 진도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최씨 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勇士)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야별초를 나누어 이를 잡게 하였는데, 그 군사의 수가 많아지므로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였다. 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별초 · 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종 44)과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정권 말엽이라 하겠다.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나타났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刑獄)의 임무를 맡았다. 경찰의 기능에 있어서는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고,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난폭(亂暴)을 금지하는 것은 원래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 수도경비대 · 친위대 · 특공대 · 경찰대 · 전위대(前衛隊) · 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253년(고종 40)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승천부(昇天府)로 갈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다. 1260년(원종 1)에는 원종이 몽골에서 돌아올 때 태손(太孫: 후의 충렬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포(梯浦)에 나가 왕을 맞아 호위하였다.
1254년 몽골의 차라대(車羅大)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都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병제(兵制)가 문란해 정부의 정규군이 무력해진 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야별초 내지 삼별초를 강화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들은 전투에 있어서 결사적이었다. 야습(夜襲)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복병(伏兵) 또는 협격(俠擊)으로 적을 쳐부수기도 하며, 최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적의 소재를 정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삼별초가 기동성이 강했기 때문에 권신(權臣)들이 자기들을 수호하고 보좌하는 부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권신에 의하여 설치되고 권신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를 맡아 공적인 성격이 농후한 군대로서, 그 지휘자도 도령(都領) · 지휘(指揮) · 교위(校尉) 등 국가관료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사병이면서도 관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의 사병보다 움직이기가 용이하였고, 이런 데서 김준(金俊) · 임연(林衍) · 송송례(宋松禮)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삼별초는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루어진 뒤에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정부와 원에 대항하여 진도(珍島)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 · 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삼별초는 최우집권기에 탄생하여, 특히 대몽항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간혹 사적인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崔竩)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林惟茂)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가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