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1270년(원종 11)에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함께 권신 임유무(林惟茂)를 죽이고 그 여당인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귀양보내고 서방3번(書房三番)과 조성색(造成色)을 없애고 왕정(王政)을 복고(復古)시켰다.
뒤이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세자 왕심(王諶: 忠烈王)이 몽고에 가자 그를 수행하였다. 1272년(원종 13)에 원나라에 가서 전년에 국호를 몽고에서 원(元)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그 해 탐라(耽羅)의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검열하는 한편,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어 군사를 징발하였다.
1273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징발, 보충하는 일을 맡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첨정동사(僉征東事)가 되어 제1차 일본정벌에 참전하였다. 그 해 재추(宰樞)로서 곽자여(郭子璵)와 함께 개체(開剃: 몽고풍속인 剃頭辮髮)하는 일에 앞장섰다.
찬성사 중찬(贊成事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는 충렬왕(忠烈王) 때 추성찬화안사공신낙랑공(推誠贊化安社功臣樂浪公)에 봉해진 송분(宋玢)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