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

  • 역사
  • 인물
  • 고려 후기
고려 후기에, 어사중승,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시호광정(匡定)
  • 이칭문계(文系)
인물/전통 인물
  • 본관남양(南陽)
  • 사망 연도1316년(충숙왕 3)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僉議侍?贊成事判前理司事
  • 출생 연도미상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천식 (전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4년 06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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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어사중승,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문계(洪文系). 인종 때 추성보국공신(推誠報國功臣)에 봉해진 홍관(洪灌)의 5세손이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진(洪縉)의 아들이며,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참지정사(參知政事) 김연(金練)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매부인 임유무(林惟茂)의 집정기에는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자문 역할을 하였다. 1270년(원종 11) 원나라에 있던 왕이 개경 환도를 명하고 귀환할 때 임유무가 왕을 배척하고 항전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왕의 밀령을 받아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동원해 권신 임유무를 죽였다.

그 뒤 세자(충렬왕)를 호종해 원의 대도(大都)에 갔는데, 원 세조(世祖)의 명으로 고려 1품직에 올랐으며, 원의 좌부승선(左副丞宣)의 직을 받았다. 귀국해서는 국정의 문란을 한탄하며 사직하였다.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나 또 사퇴했는데, 이 때 나이가 40세도 안 되었다.

그 뒤 충렬왕과 공주가 양가(良家)의 여자를 징발해 원나라에 보낼 때, 딸이 징발되자 이를 기피한 죄로 해도에 귀양갔다. 결국 두 딸이 모두 원나라에 뽑혀가고 가산까지 적몰되었다.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과 홍규의 종형 홍자번(洪子蕃) 등이 홍규가 이전에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점을 들어 면죄를 간청하였다.

가산이 반환되고 곧 풀려나, 이듬해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郎贊成事 判前理司事)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중찬을 더하고 이어서 판삼사사 수사도 영경령궁사(判三司事 守司徒 領景靈宮事)가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지고, 또 첨의정승 익성군 지익성부사(僉議政丞 益城君 知益城府事)에 올랐다. 1316년 추성진력안정공신 남양부원군 상의첨의도감사(推誠陳力安定功臣 南陽府院君 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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