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鎭州: 지금의 진천). 초명은 임승주(林承柱). 어머니는 진주 관리의 딸이다.
일찍이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종이었는데, 뒤에 고향에서 고향사람들과 힘을 합쳐 몽고병을 물리친 공으로 대정(隊正)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준(金俊)의 신임을 받아 권세를 부리다가 1258년(고종 45)에 유경(柳璥)·김준 등과 공모해 권신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복귀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받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1268년(원종 9)에 정권을 장악한 김준과 왕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고 환자(宦者) 강윤소(康允紹)와 최은·김경(金鏡)과 함께 김준을 죽이고, 김준의 아들들과 무리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다. 그 뒤 김경·최은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이들을 제거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계열(張季烈)과 대장군 기온(奇蘊)을 섬에 유배보냈다.
원나라와의 화의가 진전되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고, 또 왕과의 사이도 벌어지자 삼별초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거느리고 재추(宰樞)와 더불어 왕의 폐립을 논한 뒤 원종 대신 동생 안경공 왕창(安慶公 王淐)을 옹립하고, 자신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이 때 원나라에서 돌아오던 세자가 압록강에 이르러 소식을 듣고 다시 연경으로 돌아갔다. 이를 두려워하여 이장용(李藏用)을 절일사(節日使)로 원나라에 보내어 세자를 돌아오게 하였다. 이장용이 연경에 이르러 왕의 폐립 전모를 상세히 진술하니, 원나라에서는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보내와 왕을 폐한 사실을 힐문하자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듬해에 왕이 연경에 들어가니 왕의 폐립사실을 누설할까 두려워 아들 임유간(林惟幹)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했으나, 원제(元帝)가 직접 연경에 들어와서 진상을 해명하라 하였으므로 이를 근심하다가 죽었다.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청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