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년(공민왕 21)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1379년(우왕 5)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양광전라경상도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가 되어 왜구격퇴에 힘썼다.
같은 해 5월에 왜구가 다시 기병(騎兵) 7백, 보병 2천 명으로 진주에 침입하자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양백연(楊伯淵)·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고 적 13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왜구가 다시 광주(光州) 및 능성·화순 등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이를 방어하였다. 또, 8월에는 왜구가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진을 치자 지용기(池湧奇)·정지(鄭地)·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과 함께 적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죽은 군사가 5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왜구는 함양까지 침입하였다.
1382년 도안무사 겸 부원수(都安撫使兼副元帥)에 임명되어 정요위(定遼衛)의 군사를 대비시켰고, 다음 해 명나라가 고려에 대해 자기들을 섬기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다 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여 왔으므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에 임명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1388년 임견미(林堅味)의 반역사건에 연좌되어 참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