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적은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항쟁을 벌인 농민저항군이다. ‘초망(草莽)의 적’이라는 뜻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도(盜)·도적·서적(西賊)·남적(南賊)·토적(土賊)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에 국가와 호족에게 이중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이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난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였으며 몽골이 침입하였을 때에 항몽대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개강 환도 이후 반정부투쟁을 전개하며 삼별초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초적의 활동은 신라 말기에서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와 고려 무신정권의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9세기 말 신라의 중앙정부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지방 주 · 군에 조세를 독촉했고,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에게 이중 수탈을 당하였다. 또한 흉년과 전염병 등 자연재해가 겹쳐 농민들은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초적으로 변해 난을 일으켰다. 죽주(竹州)의 기훤(箕萱),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무신정권기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과 천민들이 무신들의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되어 자신의 신분해방을 위해, 또는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동경(東京)의 패좌(孛佐) 등이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초적의 규모는 1203년(신종 6) 초적 패좌의 무리 중에서 1천여 급을 참하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 것이나, 마산의 초적이 최우(崔瑀)에게 정병 5천여 명으로 몽고병의 격퇴를 돕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보아, 수십명에서부터 5천여 명 이상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운문산 · 마산 · 관악산 등의 초적 둔소는 천연의 요새로 공부(貢賦) · 공문서 등을 쉽게 탈취할 수 있는 주요 간선도로를 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초적은 일정한 성곽이나 군현을 행정적으로 지배하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유격전술을 썼으므로 관군이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여러 군 · 현민 중 그들과 관계를 가진 자가 많아서 관군의 동정을 잘 알아 토벌군이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초적은 1231년(고종 18) 몽고 침입 때, 스스로 항몽대열에 참여해 활약하기도 하였다. 몽고 침입 후 최우의 강화 천도의 이면에는 초적을 비롯한 지방반민들의 저항활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권유지를 위한 탈출의 의미도 있었다. 초적과 최씨정권은 몽고침략을 방어하는 대열에서는 협동이 가능하나, 상호공존할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강화천도 후 각처의 초적들은 대몽항쟁과 함께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몽고와의 야합 하에 화평이 이루어져 개경으로 환도하자, 반개경정부 · 대몽항쟁을 표방하는 삼별초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몰락으로 고려에서의 대규모 민란은 사라지고, 조선왕조가 성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초적이 기록에 보이나 후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적도(賊徒) · 적배(賊輩) · 도적 등으로 많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