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초적은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항쟁을 벌인 농민저항군이다. ‘초망(草莽)의 적’이라는 뜻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도(盜)·도적·서적(西賊)·남적(南賊)·토적(土賊)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에 국가와 호족에게 이중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이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난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였으며 몽골이 침입하였을 때에 항몽대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개강 환도 이후 반정부투쟁을 전개하며 삼별초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정의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항쟁을 벌인 농민저항군. 도·도적·서적·남적·토적·적도·적배.
개설
연원 및 변천
고려시대에는 특히 무신정권기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과 천민들이 무신들의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되어 자신의 신분해방을 위해, 또는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동경(東京)의 패좌(孛佐) 등이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내용
한편 초적은 1231년(고종 18) 몽고 침입 때, 스스로 항몽대열에 참여해 활약하기도 하였다. 몽고 침입 후 최우의 강화 천도의 이면에는 초적을 비롯한 지방반민들의 저항활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권유지를 위한 탈출의 의미도 있었다. 초적과 최씨정권은 몽고침략을 방어하는 대열에서는 협동이 가능하나, 상호공존할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강화천도 후 각처의 초적들은 대몽항쟁과 함께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몽고와의 야합 하에 화평이 이루어져 개경으로 환도하자, 반개경정부 · 대몽항쟁을 표방하는 삼별초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몰락으로 고려에서의 대규모 민란은 사라지고, 조선왕조가 성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초적이 기록에 보이나 후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적도(賊徒) · 적배(賊輩) · 도적 등으로 많이 쓰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高麗) 무신정권하(武臣政權下)에서의 경주민(慶州民)의 동태(動態)와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김호동, 『민족문화논총(民族文化論叢)』 2·3합집, 1982)
- 「항몽전(抗蒙戰)에 참여(參與)한 초적(草賊)에 대(對)하여」(김윤곤, 『동양문화(東洋文化)』 19, 1979)
-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전(對蒙抗戰)과 지방군현민(地方郡縣民)」(김윤곤, 『동양문화(東洋文化)』 19, 1979)
- 「강화천도(江華遷都)의 배경(背景)에 관(關)해서」(김윤곤, 『대구사학(大丘史學)』 15·16합집, 197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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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나라에 바치던 물건과 세금을 통틀어 이르던 말. 넓게는 조세 일반을 의미하나 좁게는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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