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

고려시대사
개념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 무인정권.
이칭
이칭
무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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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정의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 무인정권.
성립배경

무신정권의 성립은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무신정변의 원인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제도적으로도 무반은 정3품직인 상장군(上將軍)을 최고 관직으로 했고, 2품 이상인 재상(宰相) 직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재상은 문신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일반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정변의 원인의 하나였다. 이들은 전시에는 물론 평상시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였다.

셋째,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와 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이와 더불어 비대해진 문신 세력과 국왕 간의 권력에 대한 갈등과 마찰이 정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즉 국왕 의종이 자신의 신변 보호의 주축이었던 견룡군(牽龍軍)을 이용하여 문신 세력을 처단했다는 친위 쿠테타적인 성격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은 문신 중심의 정치를 구현해왔던 고려 전기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회는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성립과 몰락

무신정권은 1백 년간 존속되었는데, 변천 과정은 대체로 성립기(11701196, 혹은 전기라고도 함), 확립기(11961258, 혹은 중기라고도 함), 붕괴기(1258~1270, 혹은 후기라고도 함)로 구분하고 있다. ① 성립기는 처음 권력을 장악한 이의방(李義方) · 정중부를 거쳐 경대승(慶大升) · 이의민(李義旼)에 이르는 시기 ② 확립기는 최충헌(崔忠獻)으로부터 최씨 4대가 세습 집권한 60여 년간의 시기 ③ 붕괴기는 김준(金俊)임연(林衍) · 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집권하는 기간을 말한다.

정중부 등은 1170년(명종 원년)에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정변의 동지들을 제거한 정중부는 1179년(명종 9)에 장군 경대승에게 살해당했고, 경대승이 4년 만에 병사하자 이어서 이의민이 정권을 독점했다. 그러나 그는 1196년(명종 26)에 최충헌에게 살해당하였다.

최충헌의 등장은 고려 무신정권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최충헌은 자신이 구축한 강력한 독재정권을 자손들에게 세습시킴으로써 4대 60여 년간의 최씨정권을 형성하였다. 최충헌을 이어 최우(崔瑀)가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다시 최항(崔沆) · 최의(崔竩)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우가 집권한 지 10여 년만에 몽골의 침입이 있었고, 그 항전을 주로 최씨정권이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었다. 대내적으로 화전(和戰)을 둘러싼 대립 갈등과 전쟁으로 입은 사회경제적인 피폐는 최씨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어린 나이에 집권한 최의는 어리석고 나약해서 집권 당시에 간신들의 참소가 성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뇌물 횡령이 자행되었다. 더구나 계속되는 흉년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해 민심을 크게 잃었다.

1258년(고종 45)에 별장 김준(金俊)과 대사성 유경(柳璥) 등이 최의를 제거하고, 최씨정권을 타도하였다. 그리하여 표면상 권력은 왕에게 돌아갔으나, 실권은 무신 김준 · 임연 · 임유무 등이 차례로 행사하였다. 김준은 최씨정권을 타도하고, 최씨정권 이래로 무신집권자가 지니는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어 정권을 좌우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암살당하였다.

임연은 일찍이 김준의 천거로 낭장이 된 이후에 최의를 제거하는 데에 가담하였다. 더구나 김준을 제거한 후에는 왕의 폐립을 자행하는 한편,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권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는 1270년(원종 11)에 병사하였다. 아들 임유무가 그의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었지만 같은 해 제거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1백 년간 유지되어 온 무신정권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다.

정치

무신정권 시대의 정치는 크게 전기(성립기)와 후기(확립기 · 붕괴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신정권의 전기는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갖추지 못하고 전대의 왕권체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과도적인 정권이었다. 정중부는 왕권 체제 하의 관직인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이의민은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동 · 서반(東西班)을 위압했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들의 권력은 정치기구의 하나인 중방(重房)을 배경으로 행사되었다.

중방은 원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기관이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 무신집권자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정사를 펼쳤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 형태를 중방정치(重房政治)라 일컫는다. 중방정치는 무신들에 의한 일종의 합의제 정치를 말한다. 당시 합의제 정치가 행해진 것은 무신 집권자들이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지 못해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최씨정권이 성립되면서 그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무신정권의 후기는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춘 최씨정권이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인 독재체제의 확립은 곧 무신정권의 확립을 뜻하며,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되어 아들 최우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최충헌은 1196년(명종 26)에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였고, 조신(朝臣)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국왕에게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려 정치 · 경제 · 사회의 혼란을 시정하도록 요청하였다. 이것은 최충헌이 1인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 것이다. 결국 최충헌은 명종신종을 연이어 폐하고, 희종을 세웠다.

1209년(희종 5)에 최충헌은 청교역리(靑郊驛吏)와 여러 사찰의 승려들의 암살시도를 겪은 직후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였다. 처음 교정도감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비위의 규찰, 인사행정, 세정(稅政), 기타 서정(庶政)을 처리하는 데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 기구는 최씨정권기는 물론 김준과 임연 부자로 이어지다가 무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

교정별감이 설치된 후 최충헌이 수장인 교정별감이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의 무신집권자들도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그 직책을 가지고 정치를 좌우하였다. 교정별감은 무신집권자로서 당연히 임명되었으나, 장군직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던 것 같다. 최충헌이 장군으로서 교정별감이 되었고, 최우 또한 장군으로서 부직(父職)을 이어서 교정별감이 되었다. 그 이후 최우의 서자(庶子)였던 최항이 세습하였다. 그는 일찍 출가해 만전(萬全)이라는 이름을 얻은 선사(禪師)였으나, 1247년(고종 34)에 환속하여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이 되었으며, 이후에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의는 최항의 사생아로서 최항이 죽자 차장군(借將軍)이 되었다가 곧 교정별감이 되었다. 김준 역시 장군으로서, 임연 · 임유무 부자 또한 군직자로서 각각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교정도감에 버금가는 권력기구로 정방(政房)이 있다. 정방은 1225년(고종 12) 최우가 그의 사저(私邸)에 설치한 인사행정, 즉 전정(銓政)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권력기구는 최우가 죽은 뒤에도 역대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무신정권이 몰락된 뒤에도 존속해 국가기관이 되었다. 이후 존폐 과정이 있기는 했으나, 지인방(知印房) 또는 차자방(箚子房)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창왕상서사(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정방에 대해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 따르면,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정안(政案)을 올리면 최우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고, 그때 6품 이하의 관리는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보지를 못하였다. 최우는 이로부터 정방을 사저에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필도치[必闍赤]라 하고, 백관의 인사를 처리해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바치면 왕은 다만 이를 결재해 내릴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방의 설치 경위와 기능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일국의 인사 행정권을 장악한 것은 이미 최충헌 때에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뒤 3년 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부지사(吏部知事)를 겸해 문무관의 인사에 깊이 관여했다. 또한 교정도감을 설치한 뒤에는 인사행정을 장악하고 독단하였다. 따라서 정방의 설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종전의 교정도감의 기능 가운데 인사행정을 분리 독립시켜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한편 무신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력이었다. 무력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다. 무신정권의 사적인 기구는 도방(都房)삼별초(三別抄) 그리고 마별초(馬別抄)를 들 수 있다.

① 도방은 원래 경대승에 의해 처음으로 설치된 사병집단이었다. 경대승이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자, 무신들은 경대승을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적의를 품었다. 이에 경대승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사대 백수십 명을 사저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를 도방이라 하였다. 도방은 경대승이 죽은 이후에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구가 되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타도할 무렵부터 많은 사병을 양성해왔다. 그러나 1200년(신종 3) 그의 사병집단을 6번 도방(六番都房)이라 하여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제도화하였다. 이것은 아들 최우 때에 더욱 강화되어 내 · 외 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되었다.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저택을 호위하였고, 외도방은 친척과 기타 외부의 호위를 맡았다.

최항 때에는 분번제(分番制)를 더욱 확대해 36번으로 조직을 개편 강화하였다. 도방 36번은 최우 때의 내 · 외 도방을 통합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몽골과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도방 36번은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김준과 임연 · 임유무 부자에 의해 계승되었다가 임유무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다.

이와 같이 도방은 무신 집권자들의 사적 호위기관으로서 병력의 규모가 커서 36번의 분번 조직으로 구성되었고, 장비나 기동력에 있어서도 국가의 군대를 능가하였다.

② 삼별초는 최씨정권 때 조직된 사병집단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반관반사(半官半私)의 특수군대였다. 삼별초는 최우가 야별초(夜別抄)를 편성하여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밤에 순찰을 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도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이를 증강해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고, 거기에 몽골에 잡혔다가 도망 온 자들로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해 완성된 것이다. 완성 시기는 대체로 최항 때로 여겨진다. 삼별초는 최씨정권의 조아(爪牙)로 이용되었으며, 김준과 임연 부자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삼별초의 항쟁으로 발전되었으며, 결국 이것을 계기로 소멸되었다.

삼별초는 처음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임무였으나 차차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 기구는 경찰 임무인 포도(捕盜) · 금폭(禁暴) · 형옥(刑獄) · 국수(鞠囚)를 맡았고, 군사 임무인 도성(都城)의 수비를 비롯해 친위대(親衛隊) · 특공대(特攻隊) · 정찰대(偵察隊) · 전위대(前衛隊) · 편의대(便衣隊) 등을 담당하였다. 특히 몽골에 대한 삼별초의 항전은 주목된다. 고려는 몽골과의 항전에서 처음 정부군의 활약이 두드려졌으나, 이후 정부군을 대신한 삼별초의 항쟁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주체성 발휘에 있어서 높이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사병이라기보다는 관군적인 성격이 더 크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③ 마별초는 최우가 몽골 기병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기병대이며,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해오다가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소멸되었다. 최씨정권은 도방 · 삼별초 · 마별초 이외에도 가병(家兵)이라는 사병을 거느렸다는 주장이 있다. 최충헌의 생질인 대장군 박진재(朴晋材)가 거느렸던 문객(門客), 신종 때 최충헌이 거느렸던 시종(侍從)과 문객 3,000명, 1223년(고종 10) 최우가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축하는데 동원한 가병, 1233년(고종 20) 서경에서 홍복원(洪福源) · 필현보(畢玄甫)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우가 보낸 가병 3,000명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병이 도방 · 삼별초 · 마별초 등과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무신정권의 특수한 호위 기관으로 서방(書房)이 있었다. 서방은 최씨정권기에 이루어진 권력기구의 하나로서, 1227년(고종 14) 최우에 의해 만들어져 임유무 때까지 지속되었던 숙위기관(宿衛機關)이다. 『고려사』 최이전에 따르면, “최우의 문객 가운데는 당대의 명유(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최우는 문객 가운데 무사를 도방에 구성하였고, 문사를 서방에 구성하였다. 이처럼 문사들을 숙위하도록 한 것은 그들을 우대 포섭하겠다는 뜻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은 그들을 고문(顧問)에 등용함으로써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데에 있었다. 따라서 문사들은 무신정권 수립 이래 최우 때에 이르러 정방이 설치되고 서방이 설치됨으로써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서방은 3번의 분번제로 편성되어 도방 · 삼별초 등과 더불어 새 집권자 추대에 참여하기도 하고, 최씨정권이 타도된 뒤 왕의 행차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한편 무신정권기에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되는 것은 문신의 지위이다. 무신정권은 성립과정에서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으나, 그들이 표방한 것과 같이 문신들을 전멸시키지는 못하였다. 문신들이 비록 무력에서 열세였지만 그들이 쌓아온 세력기반이 전멸을 당할 정도로 허약하지 않았다. 무신들이 정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한 이상 필요 이상의 만행은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살을 모면한 문신들은 정치에서 추방을 당했다.

반면 무신정권기에 무신들은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능력적인 면에서 열악했고 정무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이에 무신정권은 정무 수행을 담당할 새로운 문신을 활발히 등용하였다. 당시 문신 계층은 무신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구문신(舊文臣) 계통과 향리 또는 중앙의 이속(吏屬) 등을 상대로 과거를 통해 등용하는 신진문신들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일부였고, 후자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무신정권기에는 이전 문신귀족 정치시대에 비해 과거 급제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를 보면, 문신 등용시험인 대업(大業 : 제술업명경업)에서 문신 귀족정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예종 · 인종 · 의종 3대 65년간에 비해 시행 횟수나 급제 인원이 무신정권기에 오히려 상회한 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과거가 베풀어진 상황을 통해 무신정권시대에 새 문신층이 활발히 등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최씨 정권기는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고 문인을 우대 포섭함으로써 저명한 문사들을 배출시켰다.

사회 · 경제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이 계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지방관과 향리들이 농민에 대해 압박과 수탈을 감행함으로써 농촌 사회가 피폐되고 유민(流民)이 증가되어 도둑들이 횡행하고 저항이 일어났다.

무신정변이 일어나던 의종 때만 하더라도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 · 의주(宜州 :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 등지에서 대규모의 도둑이 일어났고,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서는 수령을 내쫓는 일이 일어났다.

농민의 저항은 무신정권의 성립 이후 더욱 격화되었고, 천민들도 가담하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해 사회는 더욱 혼란하였다. 이렇게 무신정권시대에 들어 민의 저항이 격화된 것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인한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폭발한 것이다. 민의 저항 원인은 대체로 농민의 궁핍 및 성장, 중앙통제력의 약화 등을 들 수 있다.

무신정권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민의 저항은 1172년(명종 2) 서북면(西北面)의 창주(昌州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 성주(成州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 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에서의 저항이었다. 이 저항은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해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차차 전국적으로 미쳐 1175년(명종 5) 남적(南賊) 석령사(石令史)가 저항했다. 석령사를 남적이라 한 것으로 보아 개성의 남쪽에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남도 지방에서는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 · 망소이(亡所伊) 등이 무리를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저항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시켰다. 이 저항은 규모가 매우 컸는데, 한때 덕산, 직산, 여주, 진천, 아산, 청주 등지를 휩쓸다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망이 · 망소이의 저항과 때를 같이해 손청(孫淸)이 덕산에서 저항하였고, 미륵산적(彌勒山賊)이 익주(益州 :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서 저항하였다. 1182년(명종 12) 전주에서는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저항하였는데, 이는 나라에서 배를 만들면서 관리들의 독촉이 너무 가혹한데 기인하였다.

이 밖에도 남원에서 저항을 일으키는 등 저항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남적의 저항은 충청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서도 자주 일어났으며, 규모나 세력도 한층 더 컸다. 1186년(명종 16) 진주수(晉州守) 김광윤(金光允)과 안동수(安東守) 이광실(李光實) 등의 탐학이 심해 백성들이 저항을 꾀하려 하자 이들 수령을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1190년(명종 20)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 저항이 일어나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즉 동경에서 저항이 일어난 지 3년 뒤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의 효심(孝心) 등이 저항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뒤에 합세해 그 수가 몇 만에 달했으며 신라부흥을 표방하였다. 이 저항은 결국 정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지만, 밀양의 전투에서 저항군 7천여 인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저항의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1199년(신종 2)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에서 저항이 일어나 삼척 · 울진의 두 현이 함락되었다. 또 동경에서 다시 저항이 일어나 명주의 저항세력과 합세해 이웃의 주(州) · 군(郡)을 약탈하였다. 이듬해 밀양의 관노 50여 명이 운문의 저항세력에 투속했고,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의 잡족인(雜族人)들이 호족을 살해하였다. 1202년(신종 5) 탐라에서 저항이 일어났고, 경주 별초군(慶州別抄軍)의 저항도 있었다.

최충헌 집권기에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저항 가운데 진주와 동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저항이 규모가 가장 컸다. 진주에서는 평소에 주리(州吏)와 반목 대립해오던 공사(公私)의 노비들이 1200년(신종 3) 저항을 일으키고,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의 부곡(部曲) 저항군과 합세해 기세를 떨치다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동경은 앞서 김사미 · 효심 등의 저항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1202년(신종 5)에 또다시 일어나 “고려의 왕업이 거의 다 되었으나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는 격문을 돌려 운문 · 울진 · 초전 등 경상도 일대의 저항세력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을 꺾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 이와 같이 무신정권기의 저항은 그 이전과 이후의 양상이 달라, 전기는 대개 단독 세력의 저항이 일어났으나, 후기는 저항세력이 연합전선을 형성해 규모와 세력이 비대화되었다.

이외에도 1203년(신종 6) 영주의 부석사와 대구의 부인사, 청송의 쌍암사의 승도들이 저항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 간 일이 있었고, 1217년(고종 4)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최광수(崔光秀)의 저항이 일어났다.

1198년(신종 원년) 개성에서는 노비 만적(萬積)이 저항을 일으켰다. 만적은 개성 북산(北山)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공 · 사노비(公私奴婢)를 모아놓고 “정중부의 난 이래 국가의 공 · 대부(公大夫)는 천인계급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將相)이 어찌 처음부터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의 매질 밑에서 고생만 해야 할 것인가!”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이 저항은 사전에 발각되어 만적 등 1백여 명이 잡혀 죽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의 신분 해방과 더 나아가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끈다.

무신정권시대의 저항에서 또 한가지 주목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저항이다. 최충헌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1174년(명종 4)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귀법사(歸法寺), 홍화사(弘化寺)의 승려 2천여 명이 저항을 일으켜 이의민을 죽이려 했고, 1178년(명종 8) 흥왕사(興王寺)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일이 있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는 1202년(신종 5) 대구 부인사 · 동화사(桐華寺)의 승려들이 경주 별초군의 저항에 가담했고, 이듬해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의 승려들이 저항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갔다. 1217년(고종 4)에는 흥왕사를 비롯해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의 수리사(修理寺) 등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켜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렇게 무신정권이 성립되고 나서 지방 각지에서 농민 · 노비 등의 저항이 계속 일어났고, 거기에 사원 세력도 무신 집권자를 제거하려고 자주 저항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은 강경책을 써서 저항세력을 토벌하는 한편, 관작(官爵)을 주거나 혹은 군현지역에 비해 조세와 공물 부담이 많았던 부곡 · 향(鄕) · 소(所) 등의 지역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기도 하는 회유책을 써서 저항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성공이 바로 최충헌으로 하여금 강력한 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문신귀족의 발호 시대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했지만, 무신정권시대에 들어 더욱 심하였다. 권세를 잡은 무신들은 물론이고 권세가와 호족, 사원들도 혼란한 세태를 틈타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해 거대한 농장(農莊)이 출연하게 되었다. 한 집안이 소유하는 토지가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는 막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2~3명이 나타나 농민에게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부담하게 하는 상태였다. 이에 국고 수입은 감소되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져 빈곤과 고통 속에서 신음해, 사회는 더욱 혼란해져 민의 저항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문화

무신정권이 성립되자 문인 학자들 가운데는 출세를 단념하고 산촌(山村)에 묻히거나, 승려가 되는 자도 있었다. 산촌에 묻힌 문인들은 음주와 시가(詩歌)를 즐겼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기던 오세재(吳世才) · 임춘(林椿) · 이인로(李仁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아주 세상을 등진 자도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모색하는 자도 있었다. 문호로 이름이 높은 이인로는 무신정변을 당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가 세상이 조용해지자 다시 나와 과거에 응시해 벼슬을 했으며, 오세재는 벼슬의 길을 모색해 50세에 과거를 보아 급제했으나 천거를 받지 못해 끝내 벼슬을 하지 못했고, 임춘도 벼슬의 길을 찾아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씨정권기에는 문사를 우대하여 정방과 서방이 설치되어 문사를 등용함으로써 문인학자들의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렸다. 이에 이인로 · 이규보(李奎報) · 최자(崔滋) 등 저명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상을 등졌거나 출세를 했거나 간에 서로 공통되는 일면이 있어 이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했고,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 수필 문학인 패관문학(稗官文學)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물건을 의인화해 쓴 임춘의 「공방전(孔方傳)」, 이규보의 「국선생전(麴先生傳)」, 이곡(李穀)「죽부인전(竹夫人傳)」 등이 있고, 전설 · 일화 · 시화(詩話) 등을 소재로 한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등이 있으며, 후대에 나온 이제현(李齊賢)『역옹패설(櫟翁稗說)』 등도 있다. 또한 무신정권시대에는 대외적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이규보는 장편의 서사시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엮었다. 이로써 고려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임을 널리 자랑하고자 했다.

무신정권시대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계종(曹溪宗)의 성립이다. 앞서 의천(義天)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고 선종 9산(禪宗九山)의 승려들을 많이 흡수함으로써 선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선종 9산은 무신정권이 성립될 무렵 종파의 이름을 새로 조계종이라 하고 그 중흥을 꾀하였다. 조계종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게 한 이는 지눌(知訥)이었다. 그는 무신정권시대에 송광사(松廣寺)를 중심으로 활약해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등의 저서를 내어 선학(禪學)과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그의 일관된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그는 이것을 후학들에게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徑截門)」의 세 가지 방법으로 가르쳤다.

「성적등지문」은 행(行)을 말하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신(信)을 말하는 것이며, 「경절문」은 증(證)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 가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는 결국 마음을 깨닫고 닦아가기 위한 길을 제시한 것이며,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풀이로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좌선(坐禪)을 제일로 하나, 염불(念佛)이나 간경(看經)도 중요시해 선(禪)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도모한 것이다. 이는 전기의 의천이 교(敎)를 중심으로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도모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지눌에 의해 성립된 해동조계종(海東曹溪宗)은 무신정권시대에 성립된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로 이는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조계종의 성립은 종래의 교종이 현실세계와 결부해 이익을 추구한데 대해, 조계종은 심성(心性)의 도야를 강조하고 불교의 내면적인 발전을 추구한데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교종이 왕족 및 문신 귀족과 결탁해 세속적인 불교로 발전했다면 조계종은 산간 불교(山間佛敎)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조계종은 무신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갔다.

항몽투쟁

무신정권시대는 대외관계에 있어 민족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은 최씨정권의 항몽투쟁으로 표현된다. 몽골과의 약 30년 전쟁은 실로 무신정권, 특히 최씨정권이 주축이 되었다.

최우가 집권하고 있던 1231년(고종 18)에 몽골이 처음으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침범은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일단락되었으나, 몽골은 고려에 대해 막대한 물품과 동남(童男) · 동녀(童女) · 공장(工匠) 등 인물까지도 요구해 고려를 괴롭혔다. 이때 최우는 몽골과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에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강화천도는 몽골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가 되어, 1258년(고종 45) 최씨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 김준 · 임연 등 무신집권자들에 의해 항몽태세가 이어지다가,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항쟁까지 일어났다. 몽골과의 항전이 계속되는 동안 사신 왕래가 행해져 고려는 몽골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몽골은 군대의 철수에 앞서 개성 환도(還都)와 국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였다. 이에 국왕과 문신들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희망했으나, 최씨정권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최씨정권의 태도는 몽골과 강화가 성립될 경우, 최씨정권의 존재가 무의미해질 우려를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원래 무신정권이 지닌 주체적 · 민족적 의식의 반영에도 큰 비중이 있었다. 하지만 강화천도를 강행하여 향촌사회를 외면했다는 비판은 무신정권의 대몽항쟁이 자신의 정권 보위에 그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몽골과의 전투에 있어 전반기에는 정부군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후반기에 들어 약해졌고, 대신 최씨정권의 사병인 삼별초의 활약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최씨정권의 항전태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의의와 평가

무신정권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대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무신정권기 이전의 시기를 고려의 전기, 이후를 고려의 후기로 구분할 정도로 무신정권기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 변화 가운데 크게 주목을 끄는 것은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변화라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변화와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본다.

가장 뚜렷한 정치적 변화는 주체가 되던 계층이 무신이라는 점이다. 무신이란 군왕 체제하의 일정한 관직을 지니고 그것을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특수 계층을 말하며, 단순한 무인과는 구분된다. 이들 무신은 무신정권이 성립되기 이전인 문신귀족 전횡기에도 문신과 함께 쌍벽을 이루어 문무 양반 체제하에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었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사상이 풍미하던 사회에서 무신의 지위는 문신보다 낮았다.

같은 문무양반 계층인 데도 불구하고 문신은 정1품의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에게는 정3품인 상장군이 최고 관직이었으며, 정벌이나 방어 등 국가적 군사작전에 있어 최고 지휘권은 문신이 장악하고 무신은 그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또 토지계급에 있어서도 문신은 종1품인 중서령(中書令)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에 올라 전시과(田柴科) 18과(科) 중 제1과에 해당되는 전지 100결(結)과 시지(柴地) 50결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무신은 최고관직인 상장군이 되어도 전시과 18과 중 제3과에 해당되는 전지 85결과 시지 40결의 토지만을 지급받았다. 이처럼 무신정권 성립 이전 문신귀족 전횡기에 무신의 정치 사회적 지위는 문신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성립하면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해 문신의 지위를 압도하였다. 무신정권 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무신은 관록이나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국가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이와 같이 무신의 지위가 문신의 지위를 압도하게 된 것은 신분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신분 변화는 문무 간의 지위 변화뿐만 아니라 농민과 천민 등 하부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자각 운동으로의 저항이 일어났으며, 그것으로 인한 신분 질서의 동요 및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동요와 변화는 후세까지 영향을 미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중부 · 경대승의 뒤를 이어 무신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이의민은 천민 출신이면서도 무신정권의 제1인자로 군림해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이는 무신정권기의 신분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다 심각했던 것은 농민 · 천민 등 하부 계층에 의한 저항의 연속으로 신분 질서의 동요와 그 변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파급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무신정권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무신정권은 하부 계층의 저항에 대해 강경책을 써서 진압하는 한편 관직 · 물품을 주기도 하고, 향 · 소 · 부곡을 군(郡) · 현(縣)으로 승격시켜 주민의 조새 부담을 완하시키는 회유책을 썼다.

이처럼 정치의 주체가 문신에서 무신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최씨정권기에 들어서 교정도감이 설치되어 독재정치가 자행되었고 정방이 설치되어 독단의 인사행정이 이루어졌으며, 도방 · 삼별초 · 마별초 등 사적 무력집단이 운영되었다. 특히 정방은 무신정권의 몰락 후에도 존속하면서 국가 인사행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신정권기의 경제적 · 문화적인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에 하나가 토지제도의 붕괴이다. 토지제도는 무신정권의 성립 이전부터 문란했지만, 무신정권기에 들어 권세를 잡은 무신들을 중심으로 불법적인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권세가 · 호족 · 사원 등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한 집안의 토지가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는 광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두 세명씩 나타나는 상태여서 농민은 2중 3중으로 수탈을 당하였다.

토지제도의 붕괴는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사회적인 혼란과 함께 더욱 심해졌다. 농장(農莊)의 발달과 함께 농민에 대한 수탈은 한층 더 가혹해졌고, 국고 수입의 감소로 국가 재정은 악화 일로에 놓이게 되는 등 무신정권기의 토지제도 붕괴의 영향은 그 후세까지 미쳤던 것이다.

문화적인 면에서 보면, 정치적인 진출에 제약을 받던 문인들에 의해 새로운 한문학(漢文學)으로 패관문학이 등장하였다. 물건을 의인화해서 쓴 설화문학도 등장했으며, 무신정권이 지니는 강렬한 주체의식은 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장편의 서사시로 「동명왕편」을 엮어 고려가 오랜 역사의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임을 널리 자랑케 하였다.

또한 불교에 있어 선종인 조계종이 확립되었다. 조계종이 크게 떨치게 된 데에는 무신정권기의 지눌이 종풍(宗風)을 크게 진작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선종인 조계종이 왕족 및 문신귀족 등과 결탁해 세속화된 교종과는 달리, 산간불교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아감으로써 도리어 무신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게 된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무신정권기에 확립된 조계종은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무신정권기에 주목을 끄는 것은 강렬한 주체의식의 발휘이다. 고려 자체가 주체의식이 강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특히 무신정권에 있어 그것이 더욱 두드러져 몽골과 40년간 항전을 지속한 것은 참으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주체의식의 발휘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식은 무신정권의 몰락된 데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 말기의 배원정책(排元政策)의 강행과 요동정벌(遼東征伐)의 단행 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던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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