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 정권에 반발하여 승려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지방에서는 농민이나 천민의 반란에 편승하여 승려들이 봉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1203년에는 전년부터 경주의 이비(利備)와 패좌(孛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울진(蔚珍)·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등의 반란세력과 연결하여 각 주·군을 휩쓸면서 기세를 떨쳤으며,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은 3군(軍)으로 편성한 관군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던 때였다.
이렇게 경상도일대가 소란하자 송생현쌍암사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경주적(慶州賊) 이비와 패좌의 토벌에 동원되었던 좌도사(左道使) 최광의(崔匡義)가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에서는 이들 승려를 붙잡아 섬으로 귀양보내게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지방 사원(寺院)의 동요는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에 있었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일은 때를 같이하여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와 대구 부근의 부인사(符印寺)에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