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질서의 해이와 하극상 풍조 등으로 사회적으로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지방관의 탐학으로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과 노예들이 이를 타개하고자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는데, 손청의 난도 그 중의 하나이다. 1176년 11월 손청은 스스로 병마사라 칭하고 가야산을 근거지로 난을 일으켰는데, 이듬해 2월 우도병마사에 의해 그 일당과 함께 잡혀 참살됨으로써 난이 평정되었다.
손청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는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 등이 항복하였다가 다시 봉기하여 가야산의 가야사(伽耶寺)를 침범하였을 때인데, 지역적으로 같은 가야산지방인 것으로 보아 망이ㆍ망소이(亡所伊)의 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난의 목적도 경제적 궁핍 이외에 새로운 지배질서에 대한 기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