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이 수립된 이후 고려사회는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하고 이완됨에 따라 지방관과 재지(在地) 세력 등에 의한 탐학(貪虐)과 대민 수탈이 심화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186년(명종 16)에 진주(晋州)의 수령(首領) 김광윤(金光允)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일반 백성이 저항을 일으키려 하자 조정에서는 김광윤을 뇌물 받은 죄로 귀양을 보내 그 저항을 사전에 막으려 하였다. 특히, 진주는 최씨 무신정권의 집정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식읍(食邑)으로, 지배층의 수탈이 가속화되자 이 지역 일반 백성의 불만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이며, 1200년(신종 3) 진주민란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200년 진주의 공 · 사 노비가 향리[州吏]의 탐학에 항거하여 무리를 모아 향리의 집 50여 호를 불태웠다. 공 · 사 노비와 재지 세력의 대립인 이 저항은 향리들에 의해 진압되면서 더 확산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리의 한 사람인 창정(倉正) 정방의(鄭方義)가 공 · 사 노비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찾아갔는데, 이로 인해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목사(牧使) 이순중(李淳中)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정방의의 아우 정창대(鄭昌大)가 폭력으로 형을 구해 내고 불량배를 불러 모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평소 원한을 가진 사람 6,400여 명을 죽였다.
이에 따라 공 · 사 노비의 저항은 지방관과 재지 세력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조정에서는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 무마하려 했으나, 정방 일당의 세력이 커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평소 정방의와 원한이 있던 진주 사람 20여 명이 합주(陜州)의 저항 세력인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을 끌어들여 정방의를 공격하려 했으나, 도리어 패배하여 합주의 노올부곡(奴兀部曲)까지 공격 당하였다. 이로써 저항의 양상은 재지 세력과 일반 백성의 대립으로 다시 바뀌게 되었다.
정방의의 무리는 이렇게 기세를 떨쳤으나 이듬해인 1201년(신종 4)에 진주 사람들이 정방의를 토벌하여 죽이니, 정창대는 달아나고 그 일당들은 흩어짐으로써 진주민란이 진정되었다.
진주 공 · 사 노비의 저항은 중세적 계급 모순과 일반 백성의 사회의식 성장 및 시대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기가 중세적 계급 질서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라는 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저항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변혁을 요구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