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록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삼경(三京) · 대도호부(大都護府) · 목(牧) · 부(府) 등 대읍에 설치된 외관직.
이칭
이칭
사록참군사, 사록장서기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소속
삼경|대도호부|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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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록(司錄)은 고려시대에 삼경(三京) · 대도호부(大都護府) · 목(牧) · 부(府) 등 대읍(大邑)에 설치된 외관직이다. 정식 명칭은 사록참군사(司錄叅軍事)와 사록장서기였으며, 서경에는 이 두 외관직이 모두 설치되었으나, 대도호부와 목에는 후자만이 설치되었다. 임명 자격은 7품 이상이었으며, 고을의 장관인 유수(留守) · 사(使)의 행정을 보좌하는 속관(屬官)의 역할을 하였다. 무신정권기 이후, 대읍이 늘어나면서 안동부 등에도 두기 시작하였으며, 사록이 약칭이 아니라 정식명칭으로 바뀌었다.

정의
고려시대, 삼경(三京) · 대도호부(大都護府) · 목(牧) · 부(府) 등 대읍에 설치된 외관직.
설치 목적

고려시대에 삼경의 유수와 대도호부 · 목 · 부 등의 대읍(大邑)에서 장관인 유수(留守) · (使) 등의 지방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임무와 직능

사록은 사록참군사와 사록장서기의 약칭이다. 명칭으로 보건대 사록참군사는 군사에 관한 일을, 사록장서기는 행정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록이 설치된 경 · 대도호부 · 목 등은 해당 고을뿐만 아니라 관내의 여러 군현에 관한 사무도 관장하는 등 다스리는 영역이 넓기 때문에 판관 · 사록 · 법조 · 문사 · 의사 등 속관(屬官)을 많이 두어 장관의 일을 돕도록 한 것이었다.

변천사항

고려시대에 삼경 · 대도호부 · 목 · 부 등 대읍에 설치된 외관직이다. 판관(判官)과 더불어 대읍의 장관인 유수 · 사 등의 행정을 보좌하는 속관의 역할을 하였다. 사록은 고을의 읍격에 따라 명칭과 임명 자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도읍인 개경 다음으로 큰 고을인 서경의 경우, 995년(성종 14)에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1인, 7품 이상이 임명되는 사록참군사 2인, 장서기(掌書記) 1인을 두었다.

무신정권기에 사록의 설치에 변화가 생겼다. 1178(명종 8)에 사록 1인을 두고 7품으로 삼았으며, 1252년(고종 39)에는 사록겸장서기 1인을 두었다. 이것을 충선왕 이후 평양부로 고치고 정7품 참군으로 바꾸었다. 동경유수관은 987년(목종 7)에 사록참군사를 두었는데,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계림부(鷄林府)로 바꾸고 사록으로 고쳤다. 남경유수부는 문종 대에 7품 이상 사록참군사 1인을 두었는데, 1308년(충선왕 1)에 한양부(漢陽府)로 바꾸고 사록으로 고쳤다. 한편 1108년(예종 4), 윤관의 여진정벌 후에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두었을 때 사록장서기가 있었다.

대도호부와 목은 문종 때에 7품 이상의 사록겸장서기 1인을 두었고, 뒤에 사록으로 고쳤다. 도호부는 문종 대에는 관제에 없었으나 후대에 사(使)와 더불어 녹사를 두었다. 여러 고을의 사록참군사와 사록장서기는 사록으로 약칭되기도 하다가 후대에는 사록이 정식 명칭이 되었으며, 이들 외직은 형식적인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경직(京職)을 겸대하였다.

1032년(덕종 1)에 동경유수부의 사록은 녹봉이 70석이었으나, 문종록제에서 동서남경유수부의 사록참군사는 46석 10두를 받았고, 대도호부 · 8목의 사록장서기는 40석을 받았다. 다만, 이들 관직은 과거 급제자의 초직으로 자주 제수되었는데 이 경우 녹봉을 받지 못하였다. 녹봉액으로 비교하건대, 7품 이상의 계수관 고을의 사록은 6품 이상이 임명되는 제지주부군의 부사보다 조금 많거나 같아서 외관으로서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려준다.

또한 1018년(현종 9)에 정해진 외관 아종(外官衙從)의 규정에는 대도호부 · 목의 사록은 3명으로, 4명의 판관보다 적고 2명의 문사 · 의사보다 조금 많았다. 이와 같이 사록은 계수관 고을에 7품 이상의 사록참군사 또는 사록겸장서기라는 정식 명칭의 약칭으로 불리다가 충선왕 이후 참군사와 (겸)장서기를 떼어내고 사록만이 쓰이게 되었다. 무신정권기 이후에는 안동부 · 영해부(寧海府) · 정원부(定遠府) · 수원부 · 경산부(京山府) · 김주(金州) · 제주 등이 승격하면서 사록을 두었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에 외관의 수는 관할 지역의 규모와 사무의 양에 따라 다소가 정해졌다. 사록이 있는 경 · 대도호부 · 목 등의 계수관은 관할 지역도 넓고 일도 많아 사록참군사 · 사록장서기 등의 속관을 두고 군사와 행정 등에 관한 일을 분장시켜 지방행정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논문

이진한, 「고려시대 수령의 경직 겸대」(『진단학보』 95, 진단학회, 2003)
박종기, 「고려시대 외관 속관제 연구」(『진단학보』 74, 진단학회, 1992;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박종기, 「고려시대 지방관원들: 속관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24, 한국역사연구회, 1997;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이진한, 「고려시대 수령직의 제수 자격」(『사총』 55,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2)
周藤吉之, 「高麗初期の地方制度-宋の地方制度との關連において-」(『東洋大學大學院紀要』 12, 1975; 『高麗朝官僚制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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