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옥과(玉果). 자는 역락(亦樂).
체격이 크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경(經)·사(史)·백가(百家)에 두루 뛰어나 명종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다.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고공낭중(考功郎中)이 되어 전왕의 양위표(讓位表)와 신왕의 「권수청명표(權守請命表)」를 올리러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류되었다. 금인(金人)들이 조통의 재능을 사랑하여 돌려보내니, 태자문학(太子文學)을 거쳐 지서북면유수사(知西北面留守事)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동경(東京: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서 동경초무사(東京招撫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소부소감(小府少監)으로 진주안무사(晋州按撫使)가 되었다.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左諫議大夫國子監大司成翰林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최당(崔讜)·백광신(白光臣)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즐겼으며, 오세재(吳世才)·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벗하여 해좌칠현(海左七賢)으로 불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