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별초군의 난은 1202년(신종 5) 경주의 별초군이 일으킨 저항이다. 경주 별초군이 영주를 공격하였던 것은 저항의 지역적인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1193년(명종 23) 이후부터 저항 세력으로 잔존하고 있었던 운문적(雲門賊)과 부인사⋅동화사 등의 사원 세력과 합세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이는 경주와 경상도 일대의 저항 세력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배경이 중앙에 대한 위기감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사원 세력의 참여는 최씨 무신 정권의 사원 정책이 그 원인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저항은 중앙에 큰 충격을 주어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은 경주를 토벌하여 저항의 뿌리를 뽑도록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경주 사람들은 ‘신라 부흥(新羅復興)’을 표방하고 장군 석성주(石成柱)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석성주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이에 저항 세력은 항복을 청했으나, 최충헌은 오히려 초토처치병마사(招討處置兵馬使)를 3도로 나누어 파견해 토벌하였다. 저항이 평정된 1204년(희종 즉위년)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고, 경주 소관의 주 · 부 · 군 · 현과 향(鄕) · 부곡(部曲)을 안동(安東)과 상주(尙州)에 나누어 소속시켰으며,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개칭하였다.
이 저항은 무신 정권 이후에 일어난 저항 중의 하나였지만, 저항의 성격이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려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항복 의사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의 강경한 토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