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정변(戊午政變)의 위사공신(衛社功臣)인 박송비의 아들로서 최씨 무신 정권(崔氏武臣政權)에서 군인으로 입신(立身)하여 1258년(고종 45) 초반에 산원동정(散員同正)에 이르렀다. 1258년(고종 45) 3월에 별장(別將) 김준(金俊)과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이 중심이 되어 최씨 무신 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에 참여하였다. 무오정변은 최의 정권(崔竩政權)의 정치 · 경제적 실정에 불만을 품은 여러 정치 세력이 결집하여 4대 집정자인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를 이룩했던 사건을 말한다.
무오정변 때 박성대(朴成大)가 맡은 역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준의 명령에 따라 최의의 저택을 공격할 때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공로로 같은 해 7월에 차송우(車松祐) 등과 함께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 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 19인(혹은 20인)에 책록되었다.
1268년(원종 9) 12월에 김준 정권의 집정자 김준이 강윤소(康允紹)와 임연(林衍) 등에 의해 피살될 때 김준의 아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김주(金柱, 초명 김용재(金用材))가 도방(都房)의 군사를 규합하여 항거하려 하자, 박성대는 원종(元宗)의 명령을 받아 김주를 체포하였다.
박성대는 1273년(원종 14) 6월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몽골 장수 힌두[忻都]를 개경의 교외에서 영접하였으나, 주연(酒宴)이 성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충렬왕이 서북면(西北面)에서 몽골 공주를 맞이할 때 그가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258년 7월 위사보좌공신 19인(혹은 20인)에 포함되었고, 1260년 6월 위사보좌공신 15인에 다시 책봉되었다.